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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기록

증도가의 재발견 - 연세기 그래서 그런 세상

by tripmemory 2025. 4.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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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도가의 재발견

그러나 변화가 여기에만 머물러 있지는 않다. 미국과 함께 세계를 양분하고 있던 소련이 해체되어 사회주의가 몰락해 한때 철천지원수였던 아카가 이제 적군이 아니게 됐다. 한때 혈맹이었던 미국도 한국의 경제가 성장해 같은 시장을 둘러싸고 경쟁하게 되고 나서는 더 이상 큰 집이 될 수 없게 됐다. 이러한 와중에 경험한 가치관의 변화를 모두 말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내일이라면 어떻게 바뀌는지 모르는 세계 속에서 내일이라면 지켜질지도 모르는 제도에 따라 내일이라면 던져버릴지도 모르는 생각을 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이 시대 우리의 생활이다. 그러고 보니 생활의 질 같은 것은 되돌아볼 여유가 거의 없다. 조금 한눈에 본 날이라면 인생의 함정이 되어 대도시의 지하도 한 구석에서 선잠자는 자신의 모습을 확인하기 쉽기 때문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괴로워하는 문제를 지금 나에게 다가온 것이 아니라고 해서, 외면해도 아무것도 없는 것일까? 누가 생각해도 그것이 아닐 것이다. 그리고 내가 생각할 때는 분명히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다운 인생을 평생에 걸쳐 찾아온 구도자의 한 사람으로서 선반들과 술잔을 주고받고 선문답을 주고받지 못하고 세상으로 돌아가는 고통스러운 이야기를 이끌어내는 이유가 “지금은 말해야 할 때”라고 느꼈기 때문이다. ㅡ 강 같은 세상 격동의 일세기를 모두 살아낸 것은 아니지만, 부모로부터 배워,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이웃과 부대해 살아 온 50년 세월은 일세기를 체험한 것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을 떠나 금전이 되어 버린 세계에서 인류의 미래는 없다. 어느 시대, 어떤 사회에서도 경제가 사회를 존립시키는 가장 기본적인 토대라는 경제학자들의 주장을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지만, 올바른 말이라고 찬동할 수도 없다.

 

ㅡ 현대 사회의 붕괴의 징후 인간도 자연의 일부이기 때문에 인간이 만든 사회도 자연법칙의 지배를 받는다. 원시시대나 고대 사회는 말할 필요도 없고, 오늘날 발전한 사회도 자연법칙에서 벗어날 수 없다. 종종 역사를 강물에 비유한다면 인간의 역사도 강의 흐름처럼 보일수록 자연의 법칙에 충실히 따르고 있다는 의미인 것 같다. 역사에 비추어 보면 현대사회는 분명한 붕괴의 징조를 보이고 있다. 그것도 부분적이고 지엽적인 붕괴가 아니라 전반적인 붕괴 징후를 보인다. 이와 같이 단정하는 근거는 자연법칙이다. 물질이라는 것은 낮은 곳에 많이 모여 높은 곳에는 적게 남아 있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다. 물은 바다에 모이고 흙은 산 정상이 아니라 산기슭에 모인다. 그런데 현대사회에서는 부의 극단적인 상부 집중 현상을 보이고 있다. 인류가 창출한 부의 대부분이 일부 선진국에 모여 있어 선진국 중에서도 극히 제한된 일부 상류층에 그 나라의 부가 집중하고 있는 사정이다. 한 학자의 연구에 따르면 자연 상태에서는 20:80의 법칙이 발견된다고 한다. 인구의 80%가 20%의 토지에 모여 살고 있어 사회적으로도 20%의 사람들이 80%의 부를 차지하는 것이 일반적이라고 한다. 따라서 어느 정도의 사회적 불평등은 오히려 자연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 불평등이 심한 경우는 자연의 질서에 역행해 문제가 일어난다는 것이다. 선진국 중에서도 미국의 경우 상위 5%의 인구가 미국 전체부의 8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고 한다. 마치 산을 거꾸로 세운 듯한 형국이다. 산을 거꾸로 세워 무너지지 않을 것을 기대하면 정기적이지 않을 것이다. 옛 사람들은 역사에서 세계를 배우도록 가르쳐 왔습니다. 사람이 사람으로서 살아가는 가운데 살아가는 생생한 지역과 시대를 초월해 어차피 닮을 수밖에 없는 것을 경험을 통해 배워 후대에 가르친 것이다. 한 집에 살고 있었다고 고려말 권문세족들은 산과 강에서 전답의 경계를 정했고, 조선말 세도가들도 그들의 땅을 밟지 않으면 옆 마을로 건너갈 수 없다는 정도였다.

 

이 상황을 유대인들은 김상인에게 나섰다. 오늘까지 금융업이라는 말로 미화되지만, 옛날에는 유럽에서도 짐승이나 하는 것으로 생각했던 대금업을 유대인이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오늘의 주식회사 제도도 유대인들이 창안한 것이다. 어떤 것도 돈으로 바꿀 수 있는 상술, 그것이 금전 만능 사고 방식의 기초인 셈이다. 과학적 사고 방식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인시타인의 혁명적 과학 이론에 의해 지원되고 발전된 현대 과학은 그 이전에 사람들이 믿었던 하나님의 권능이 모두 자연 법칙에 불과하다는 것을 밝혔다. 그리고 하나님의 존재는 과학적으로 검증할 수 없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과학을 믿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과학을 믿는 것 자체는 사회적으로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과학이 하나님을 검증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지 않게 된 것이 사회적인 문제다. 하나님을 믿는 것, 즉 종교는 단순히 신앙의 문제에 그치지 않는다. 종교는 인류 문명의 초기부터 인류와 함께 왔기 때문에 모든 사회적 가치와 멀어져야만 놓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하늘을 두려워하고 조상을 존중하는 정신이 없는 사람들에게 반사회적 행위와 부정은 이미 죄가 아니다. 법률을 가진 자의 이익을 보장하기 위해 만들어졌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범죄는 더 이상 죄가 아닙니다. 당연한 저항권에 불과하다. 그렇지 않니? 그러므로 오늘날 사회의 붕괴 위기는 완전히 유대인에게 그 책임이 돌아왔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유대인을 단죄해야 한다고 외치는 것은 아니다. 그러한 실수는 히틀러의 나치즘만으로 충분합니다. 유대인이 세상을 이렇게 만들지는 않았지만, 그들도 희생자다. 틀린 종교의 희생자였고 전혀 잘못된 다른 종교인에 의해 박해된 희생자였습니다. 실은 세상에 한쪽만 틀린 경우는 없다. 서로가 잘못되어 문제가 생겨 풀 수 없을 뿐이다. 앞으로 유대인에게 오늘의 문제를 일으킨 보다 깊은 원인, 현대사회를 멸망으로 이끄는 보다 근본적인 오염원을 찾아 분석해 보자. ㅡ, 오래된 질 유대 민족은 많은 이점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다른 민족들로부터 오랜 세월 동안 배척되고 미움받은 민족이다. 그 중에서도 히틀러의 나치즘에 의한 박해는 인류의 역사에서도 유례를 찾기가 어려울 정도로 잔혹하고 가혹한 박해로 꼽힌다.

 

세계가 하나님의 의지에 따라 운행된다고 생각했던 중세 유럽인의 생활 방식과 세계가 과학전의 원리에 따라 운행된다고 생각하는 현대인의 생활 방식의 차이만을 봐도 그 차이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러면 원죄설을 신봉하는 유대인의 사고방식이 예수의 구설설을 신봉하는 그리스도인의 사고방식보다 나쁜 것일까. 사람마다 다른 의견을 말할 수 있겠지만, 내 견해로는 분명히 그렇다. 그 이유는 다른 무엇보다도 죄의식이 인간에 미치는 부정적인 영향이 너무 커서다. 죄는 물론 나쁘다. 나쁘지 않으면 사회적인 제재를 받을 이유도 없고 양심의 비난에 시달리지 않을 것이다. 죄는 나쁘기 때문에 인류의 오랜 경험에 의해 죄에 해당하는 사악한 행위가 규정되어 그러한 행위에는 제재가 가해지게 되었다고 보는 것이 옳다. 그러나 죄 그 자체보다 나쁜 것은 죄의식이다. 유마가사의 일화는 죄의식이라는 것이 근본적으로 사람이 빠져나가야 하는 굴착에 불과하다고 가르치고 있다. 두 개의 관골구가 후카야마 미야타니에서 흙을 파고 공부를 하는데, 어느 날, 어느 관골구가 일이 있어 밖에 나와, 어느 관골구가 공부를 하면서 졸려 잠들어 버렸습니다. 이윽고 그때, 한 젊은 여성이 나무를 하고 와서, 잘생긴 승려가 자고 있는 것을 보고는 나쁜 생각이 나오고, 그 승려에 달려 음행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 승려가 눈을 뜨고 자신이 반드시 잘못한 것은 아니지만, 본의가 아니라 음행을 해 버렸기 때문에, 얼마나 걱정이 되었습니까? 이윽고 자신의 알선이 왔기 때문에 “너가 없는 사이에 잠들었지만, 그 여자가 나에게 달려 봤던 것이 아니라 음행시켰기 때문에 어떻게 하면 좋을까? 이렇게 한 관골구는 본의가 아니라 음행을 저지르게 되었고, 한 외구는 고의로 한 것은 아니지만 살생을 하게 되었기 때문에 말하면 과실치사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두 사람의 관대함이 걱정된 끝에, 불 당시의 계율 제일이라고 말한 우파 이존자를 찾아가서, “우리가 율행을 저지르고 정말 부끄럽게 감히 불에 체포할 수 없고, 존자를 방문했기 때문에 우리 의회를 풀었다”고 했습니다.

 

이에 비해 유대 민족의 사정은 조금도 좋아지지 않았다. 원죄는 원죄대로 남아 있고 구원을 거부한 코멘트는 비참한 보복으로 돌아왔다. 예수님을 따르는 인류 전체를 적에게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결국 유대인을 2천년에 걸쳐 나라가 없는 백성이 되어 떠돌게 한 주범은 예수도 로마인도 아닌 원죄의 죄 의식이 만들어낸 부정적인 에너지다. 나치에 의한 박해도 이슬람 국가의 도전도 그 궁극의 원인은 원죄의식의 부정적 에너지라는 말이다. 이러한 원죄의식의 부정적인 영향력을 알면 기독교에서는 지금도 구약성경을 폐기할 것이다. 그리고 예수의 가르침인 복음서만으로 믿음을 재확립해 나갈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기회조차 사실상 이미 무산이 됐다. 왜냐하면 기독교 신앙이 더 이상 인류의 정신을 지배하는 중심 사상으로서의 지위를 유지하지 않기 때문이다. 중세의 르네상스 시대까지만 해도, 지동설을 주장하고 있던 세기의 지성마저도, 천재 할 수 있었던 기독교의 절대적 권위는, 지금 야만 시대의 황량한 해프닝으로 다스리고 있다. 기독교의 권위는 과학의 도전을 이기지 못하고 마음의 평화를 위해 믿어주는 것이 나쁜 일이 없는 전통적 정신문화 정도 수준으로 평가 끊어진 것이 현실이다. 그렇다면 원죄설의 해독이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을까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사정이 그리 간단하지 않다. 정화된 원죄설은 영향력을 상실했지만 원죄설의 원조는 보다 강력한 종교로 진화해 해독을 미치고 있기 때문이다. 진화한 원죄설은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으며, 그 가르침을 떠나 사는 것이 심하게 불편한 현대의 상식인 과학이다. 현대과학이야말로 원죄설의 회태인 구약성서 창세기의 현대적 변형인 신창세기로 명명된 아인시타인의 상대성 이론을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ㅡ, 빌딩숲의 유목민 생각의 힘은 무섭다. 사람의 생각보다 무서운 일이 있습니까? 자연의 힘이 무서운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 자연을 송보리 눈 파괴할 수 있는 사람의 생각은 자연의 힘보다 무섭다고는 말할 수 없다.

 

이들이 그런 선택을 하게 한 것은 역설적으로도 이들 민족의 뛰어난 교육방식 때문이다. 유대인의 뛰어난 교육 방법은 유대인의 사고방식을 2천년 전에 사막을 방랑했을 때나 현대 맨해튼의 빌딩 숲을 걸을 때나 반드시 같은 모습을 유지하도록 했다. 유대민족의 사고방식은 2천년 전이나 지금도 변하지 않았다. 그들의 신앙이 그때나 지금도 변하지 않은 구약성경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성경에 따르면, 그들은 종말의 날에 구원되어야 하는 민족이며, 그들이 구원받을 때 다른 민족은 멸망하고 그들이 세상을 지배하도록 운명을 받는다. 그런 하나님의 말씀을 예언대로 성취하기 위해 유대인들은 그 털이 박해를 받으면서도 기독교 신앙으로 개종하지 않았고, 그 오랜 세월에 걸쳐 민족 전체가 하나의 목표를 향해 노력해 지금 그 결말을 눈앞에 두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이 아마 유대인 개개인이 의도한 결과가 아닐지도 모른다. 아니, 유대인의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성질을 근거로 추정할 때, 지금의 상황을 조성하는데 공헌한 일단의 유대인 지성인조차도, 자신들이 멸망의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단지 자신들의 믿음에 충실하고 구원의 희망을 잃은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살아남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 그들이 중시하는 실생활에서의 성공을 위해 힘을 다했을 뿐이다. 그러나 그러한 정신이 구약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에 지배되고 있으며, 그들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의 섭리를 충실히 수행하게 되었다. 이런 결과야말로 신앙의 힘이 얼마나 무서운가를 나타내는 실례가 아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들이 시도한 하나님의 영역에 대한 도전은 한때 실패한 바벨 탑 건설과 같은 불확실한 도전이며 실패가 예정된 도전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이 가지고 있다고 그려진 기술력은 준비하려고 하면서도 막상 신으로서 필요한 자질인 초월과 사랑을 얻으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의 내부의 파멸적 에너지인 원죄의 죄 의식을 극복할 수 없으며, 하나님의 속성인 사랑을 내면화하지 않고 성경에 기록된 분노와 저주에 종사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추진하는 멸망의 프로젝트는 성경에 기록된 분노와 여러 신인 여호와의 구상입니다. 그에게 복종하지 않고 그의 백성을 대항하는 모든 나라와 백성은 지옥에 던져져 영원한 고통을 받아야 하며 그를 믿고 복종하는 유대 민족만이 구원과 천국의 행복을 약속한다. 그것이 천지를 창조한 창조 주신님의 본심일까? 그렇다면 여호와께서는 천지를 창조한 창조주가 아닙니다. 즉, 여호와께서 유대인의 심성을 통해 자신을 계시한 창조주라면 성경에 기록된 분노와 저주의 메시지는 결코 여호와의 말씀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속성은 단지 사랑일 뿐, 결코 분노도 복수도 아니다. 하나님은 스스로를 자신이 창조한 세계 안에 나타나고, 피조세계의 속성이 곧 하나님 자신의 속성이다. 창조주가 곧 피조세계다. 이러한 사실은 상대성 이론 자체가 암시한다. 물질을 만든 힘인 에너지는 공간적 요소인 질량과 시간적 요소인 광속도로 나뉘어 피조세계를 구성한다. 시간이나 공간적 요소가 없어지면 힘 자체가 사라집니다. 우주가 시간과 공간의 결합이라면, 에너지는 우주가 존재하도록 한 것, 간단히 말해 창조주입니다. 따라서 그들의 논리에 따라 창조주는 곧 피조세계이며 피조세계는 곧 창조주 자신이다. 자신을 사랑하는 것은 존재의 기본 속성이다. 그래서 그 유명한 고린도전서 13장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에 기록된 저주와 여러 의지와 징벌의 메시지는 본래의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전달자에 의해 개조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유대 민족을 세계의 통치자로 만들고 싶었던 유대인 중 일부가 여호와의 저주가 자신의 욕망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속여 기록한 것입니다.

 

유대민족이 성경의 말씀을 분석하고 재해석하여 멸망 시나리오를 수정하고 있는지, 아니면 본래의 각본에 충실히 따르고 있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다만 지금의 세계정세를 보면서 추측하면 유대민족은 성경의 예언에 충실히 따르고 있다고 판단된다. ㅡ 진정한 구원의 길 유대 민족에 의해 진행되는 멸망의 시나리오는 결코 유대 민족을 구할 수 있는 더욱 인류를 구하기 위한 올바른 방법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인류와 유대 민족을 동시에 멸망시키고, 또한 그 피조물을 창조한 여호와까지 멸망시키는 종말의 시나리오에 불과하다. 진정한 구원의 길은 유대 민족이 수천 년 동안 분쇄하고 살아온 원죄의 죄 의식에서 벗어나 자신에 대한 사랑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유대인이 과학만능의 사고방식을 폐기하고 금전만능의 경제원리를 포기하지 않으면 현대문명의 붕괴는 돌이킬 수 없는 필연이다. 그리고 유감스럽게도 유대인들이 그들의 믿음과 희망을 포기할 가능성은 없는 것 같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유대민족이 아닌 다른 민족과 이교도들은 나름대로의 자구책을 모색할 수밖에 없다. 그런 자구책의 하나로 제시하는 것이 앞으로 써 가는 강사상이다. ㅡ, 그런 세계 어려운 시기에 어려운 나라에서 태어나 어려워 살아가면 세상을 보는 눈도 츠키칸의 경지에 들어가는 것 같다. 세상이 그냥 그렇게 보이기 때문이다. 아마 연령치를 하도록 그럴지도 모른다. 옛 사람이 나이 50에 천명을 알았다고 했지만, 나도 50열에 들어가 진리의 한 모퉁이를 겉으로 보는 것처럼 그렇다. 왜냐하면, 그런 것이 세계의 진짜 모습이기 때문이다. 진리의 모습은 옛날부터 「그렇다」는 한 문자로 그려져 왔다. 옳다는 말인 당연(當然)은 「연」에 맞는다는 의미이며, 노자가 「길이라는 것은 자연을 본뜬 것(도법자연)」이라고 말했을 때의 길(진리)은 자연, 즉 자연스럽게 그런 것을 모방하게 된다. 불교로 마음의 진정한 모습을 그린 청원본연도 맑고 청결하고 본래 보인다는 말이다.

 

사람이 만지지 않은 상태를 나타내는 말로 연이 사용된 셈이다. "그렇게" 또는 "그럼"야말로 다른 요소가 개입되지 않은 우주의 실상 그대로를 묘사하기에 가장 적합한 말인지 보다. 그러고 보니 그렇다는 말은 확실히 포용 범위가 넓은 말이다. 크고, 작고, 차갑고 뜨겁고, 더럽고 깨끗한 모든 상태를 그런 상태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불교와 도교는 종종 인류가 도달한 최고의 정신 영역으로 평가된다. 한때 합리주의에 사로잡힌 서양인에 의해 신비주의로 팔린 적도 있었지만, 합리주의 한계가 야기한 현대 문명의 문제점에 대한 반성이 퍼져 현대 위기를 극복하는 적절한 대안으로 극찬되기도 하는 사상이 불교와 도교의 가르침이다. 그런 불교와 도교가 진리를 나타내는 말로 공통적으로 써 온 말이 그렇게 열려 있다. 불교와 도교가 연을 최상의 진리로 인정한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 중 지금 우리가 재고해야 할 부분은 인간 정신의 한계가 아닐까 생각한다.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라고 스스로를 과대평가하지만, 그 인간의 생각은 만물의 영장이라는 말이 무색이 될 만큼 제한적이며, 심지어는 편협할 때까지 한 경우가 많다. 그리고 우리는 유대민족을 보면서 그 극단적인 모습을 확인한 바 있다. 만약 유대민족이 자연을 받아들였다면 인류의 역사 가운데 가장 잔혹한 사건은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인간의 정신이 도달할 수는 있지만 지배하거나 통제할 수 없는 궁극의 진리상태를 받아들이고 그들의 신으로부터 그러한 신성을 발견했다면 주변 민족이나 이교도들과의 무한한 투쟁은 없었을 것이며 오늘의 위기 상황도 예방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자연이 아니라 하나님을 선택했습니다. 그 신은 자신을 천지를 창조한 신이라고 소개하지만, 실상을 알면 자연을 지배하고 싶은 인간의 욕망이 투사된 허상에 불과하다. 자연, 궁극의 진리로서의 자연이 아니라 인간을 둘러싼 외부 환경인 자연의 위력을 강요당한 인간이 자연을 지배하는 초월적인 능력자를 상상하고 만들어 그 상상속의 실체를 숭배한 것이 신이다.

 

그러한 신앙의 대상, 궁극의 진리로 믿어지는 대상이 어떤 것인지는 사실상 큰 문제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 안에 자고 있는 신앙의 씨가 싹트는 것이며, 그러한 신앙이 가진 힘은 “당신이 겨자와 같은 신앙만으로도 그 산이 들려 바다에 던져져도 그대로 된다”고 한 예수의 말대로다. 사람들은 궁극의 진리의 존재와 자신의 성취 가능성에 대해 겨자 같은 믿음을 가지는 것도 어렵다. 눈에 보이지 않고 귀에 들리지 않는 정신적 가치보다 눈앞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물질적, 육체적 요소가 더 진실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육체가 가르치는 것은 보통 한계와 장애의 경우가 대부분이며, 가능성의 경우는 거의 없다. 이런 눈과 귀의 방해와 유혹은 궁극의 진리를 찾아가는 동안 한순간도 멈추지 않고 계속된다. 정신이 육체와 물질의 속박을 벗은 뒤에는 영의 모습을 하고 나타나며 방해를 계속하는 것이 감각기관의 끈끈한 속성이다. 진리를 얻으면 공부하고 있던 사람이 하나님이나 불보살을 만나 진리를 받았다고 하는 모든 경우가 실제로는 이런 감각기관의 방해다. 기도와 명상상태에서 만나는 정신적 존재의 공포는 현실생활에서 만나는 물질적 존재의 공포에 결코 지지 않는다. 궁극의 진리에 대한 확고한 부동한 신앙을 강조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그 신앙의 크기와 같은 진리가 구도자에게 주어집니다. 불교의 염엄경은 수행자들이 궁극의 진리를 얻은 것과 착각해 횡도에 빠지기 쉬운 경우를 50종류도 예로 들어 설명하고 있다. 이런 정신적 방해자들에게 걸리면 빠져나가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죽으면 버리고 떠나야 하는 육체의 쌍을 만나도 수불을 들이지 않고 덤비하는 것이 사람이다. 사랑의 기쁨과 이별의 고통을 표현한 그 많은 시와 노래가 그 무서운 집착을 보이고 있다. 그런데 육체의 제약에서 벗어나 정신적으로 궁합이 맞는 하나님을 만난다면, 그 대부분이 자신이 꿈에 그린 이성의 모습으로 나타나면 그 결과를 굳이 하루가 실례까지 들어가서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 때문에 육체가 낳는 어떤 허상에도 이끌리지 않을 만큼 굳고 깊고 굳은 믿음이 필요한 것이다. 이런 신앙만 갖추면 나머지 과정은 몇 가지 있지만, 조심하면 그리 어렵지 않다.

 

어느 정도 배운다면 먹고 사는데 지장이 없을 정도로 세상에 대해 알면 아이들은 보통 더 이상 듣지 않는다. 부모가 가르치고 싶은 것이 먹고 사는 방법 정도이므로 다른 것을 들어봐도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을 얻고, 그러한 경우도 있고, 자신이 듣고 싶은 대답을 해주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그러한 경우도 있고, 다른 사람도 모른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어 그러한 경우도 있다. 아이들을 보고 자신이 언제 묻는 것을 그만두었는지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그 때 중단한 질문을 지금 계속하도록 하십시오. 연성의 길을 가는 구도자가 두 번째로 대비해야 하는 여행 장비는 아는 길도 들어가는 마음의 가난함이다. ㅡ, 뒤돌아보며 안을 봐 지금까지 잘 따라 왔습니까? 말이 되지 않는 소리만 계속하면 지쳐서 그만두지 않았는가? 하지만 막상 어부성설은 아직 시작되지 않았다. 지금까지 말한 말은 내 입장에서는 지극히 정상적인 언설이라는 말이다. 참선하는 선사들이 던지는 선언답이라고 말해 나오지 않겠지만, 향후 본론이 시작되면 그야말로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 시도할 때도 없이 튀어나올 것이다. 기대해도 좋다고 한다. 여기까지 잘 따라오면, 지금쯤의 당신의 눈빛은 촉촉하게 젖어 있을 것이다. 내 말이 당신을 감동시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되돌아 보면서 잃고 살아 있던 보물이 유감스러운 마음에 외로움이 담겨질 것이다. 그런 슬픔에 갇힌 눈으로 지금 자신을 되돌아 보자. 머리를 돌려 당신을 되돌아 보면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 보면 거기에 당신이 잃어 버렸다고 생각한 가장 중요한 보물, 당신의 본연이 드러납니다. 진리는 자신 안에 있다. 불교에서 말하는 것처럼 머리만 돌리면 피난이며 유교에서 말하는 것처럼 하루 세 번 되돌아 살아가면 허물이 없어진다. 돌아보고 안을 본다, 이것이야말로 연성의 길에 가장 필요한 장비인 신발에 해당한다. 앞서 설명한 신앙은 여행의 목적지에 해당하며 아는 것을 묻는 질문이 지도와 같은 역할을 한다면 되돌아보는 것이 신발을 입고 실제로 떠나는 여행길이다.

 

다시 말하지만, 자연은 내 안에 있습니다. 나 안에 있는 자연적인 마음의 본연이 나타나지 않으면, 나의 밖의 어디에서나 자연은 만날 수 없다. 천부경에서 말하는 것을 “천지가 사람 가운데 하나가 되어 있다”며 불교에서는 “모두가 마음이 지은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예수님도 “너희들의 몸이 성전”이라고 말씀하셨다. 성전은 신이 모셔져 있는 곳이다. 사람과 하나님이 만나는 곳이 성전입니다. 그 성전이 당신들의 몸이었다. 몸 안에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곳은 어디입니까? 우리의 마음, 생각 속이다. 이 되돌아 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태어난 순간부터 같은 살고 싶다는 충동에 달려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과거를 되돌아 보는 시간은 낭비라고 생각된다. 사람들이 본능적으로 방문하는 것을 싫어하는 곳이므로, 훔칠 위험이 가장 적은 거기에 자연은 자신을 숨겨 두었다. 그렇게 깊이 숨어야 사람들이 진리에 신경쓰지 않고 윤회의 바퀴를 따라 근면하게 달릴 수 있기 때문이다. 뛰어난 세상의 고기가 윤회의 몸바퀴 주위에 혐기스러운 사람이라면 목을 돌려 내 안을 바라보라. 단지 거기서만 구원의 길이 열려 있다. ㅡ 죽어도 중단하지 마세요. 몸이 죽고 죽는다 백골이 떨리고 정신도 없습니다. 임향의 한쪽 단심이라고 생각합니다. 고려말명을 바치고 고려왕조에 충성을 다한 정몽주의 유명한 시조인 단심가다. 나는 정몽주의의 충성을 너무 많이 탐정하는 것을 생각하지 않는다. 목숨을 바쳐 자신의 의지를 지킨 의리와 용기는 가상이지만, 당시 고려왕조가 그가 목숨을 바칠 때까지 지켜야 할 만큼 좋은 지배층이었다고는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이 시조를 빌려온 이유는, 이 시조가 연성의 마음의 자세를 나타내기 위해 그만두기 때문이다. 우선은 타이틀부터가 괜찮다. 한자로 쓰면 단심가로 피로 보여주는 균일한 마음의 노래라는 뜻이지만, 실제로 그는 붉은 피를 보여 죽어 그 핏마크가 사라지지 않는 기적을 보였다. 역사의 소용돌이에서 아프게 희생된 그의 마음을 위로한다는 의미에서 이 단심가를 단심가로 이름을 고치기로 하자. 마음을 자르는 연성의 각오를 되돌아 보는 노래이다.

 

왜냐하면 연성의 길에서는 반드시 죽음의 고개를 만나고, 그때 반드시 죽어야 하기 때문이다. 육체가 죽는 것이 아니라, 정신이 죽고, 본래의 내가 죽는 것이 아니라, 나라고 생각해 온 거짓의 내가 죽는다. 이 죽음을 거치지 않으면 연성은 할 수 없다. 내가 있는 한 당신도 남아 있고 당신과 내가 남아 있으면 본래가 아니다. 불교의 금강경에서 "나도 없고, 당신도 없고, 중생도 없고, 수행자도 없다"며 "내가 없어진다"를 첫머리에 두는 이유도 그런 의미입니다. 스스로를 제대로 되돌아 보면, 자신의 존재의 의미가 점점 부서지고, 끝나는 자신이 미치는 것 같고 죽는 듯한 혼란스러운 느낌이 든다. 그런데 그것은 단순한 느낌이 아니라 실제 상황이다. 나라는 생각이 없어지는 것은 육체의 죽음보다 확실한 죽음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지나온 긴긴 세월 동안 몸이 죽고 죽고 100회 고쳐 죽어도 죽을 수 없었던 것이 나라라는 생각이다. 의학자들에 따르면 우리 몸은 쉬지 않고 죽은 세포를 내고 새로운 세포로 바꾸어 보충하면서 살아가지만 뇌세포까지 한 번 완전히 바꾸는 데 27년이 걸린다고 한다. 그렇게 보면, 이미 한번 죽고 두번째 죽는 날이 가깝지만, 이 생각은 여전히 ​​나를 고집하고 있다. 이 조건은 죽은 눈이 깨어도 변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런 ‘나라는 생각’이 모든 고통의 원인인 것이 석가의 가르침이다. 따라서 이 나는 반드시 없애야 하는 번영괴다. 그러므로 연성하려는 구도자는 죽음의 공포에 굴복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이 죽음의 고비를 쉽게 건네기 위해서는, 이전 단계의 준비가 충실해야 한다. 그러니 다시 강조한다. "마음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는지, 천국이 우리의 것이기 때문에..." ㅡ, 와주시기 바랍니다. 연성을 위해서는 자연의 법칙에 충실한 것이 제일이다. 사람은 하늘을 본, 하늘은 길을 본, 돌리는 자연을 모방했다는 노자의 말을 생각하면, 궁극의 진리를 향한 구도의 길이, 결국은 자연을 모방하게 된다.

 

실제로 인류문명은 자연을 모색하면서 성장발전해왔다. 새들을 보고 집을 지어, 벌레를 보고 옷을 만들어 입고, 거미를 보고 그물을 만들었다. 나무를 본뜬 기둥을 지은 집을 지어 조개를 본뜬 그릇을 만들고, 덤불을 본뜬 자끈을 비틀고 개미를 모방하여 군대를 만들고 거북이를 모방하여 갑옷을 만들었다. 현대에 와도 자연을 본뜬 기술개발은 이어진다. 박쥐를 보고 레이더가 만들어지고, 고래를 보고 잠수함이 만들어지고, 벌집을 보고 고층 건물이 세워진다. 물질문명은 끊임없이 자연을 모방하고 발달하고 있지만 정신문명은 자연을 모방하는 분야에서 급속히 퇴보하고 있다. 기술의 진보로 인한 것이다. 강 같은 세계는 댐막은 세계에서 옛 속담이 되고, 뿔의 돌이 맞다는 말은 개성시대를 예견할 수 없었던 고정관념으로 다스려지며, 토지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말은 농업정책에 의해 낭비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고 보니 자연 현상이 인간 정신의 모범이 된 시대는 이미 지나간 것 같다. 어쩌면 인간 문명의 발전에 따른 사고 방식의 급격한 변화 때문에 오늘날과 같은 사회 규범의 혼란과 사회적 질서의 붕괴가 일어났을 것이다. 그렇다면 정신 영역에서도 물질 영역에 이은 혁명적인 전환점이 필요하다. 자연이 정신의 모범이 되도록 하는 자연의 재발견이 긴급하게 필요하다. 그렇다고 해서 그런 자연의 재발견이 반드시 새로운 진리의 창출일 필요는 없다. 신창세기가 이미 있는 성전을 새롭게 해석하고 돌파구를 찾은 것처럼 연사상도 이미 있는 가르침을 재조명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인과보상의 법칙은 연성의 원리로 부족하지 않다. 주님께서 받는 것이 당연하니까, 무엇 하나 가지고 있어서는 연성에 방해가 된다는 것이다. 다시 태어날 때까지는 다가오는 모든 생각을 오는 대로 보내 버린다. 탐음진치사종마는 말할 필요도 없이, 희로애락 애기욕의 7위도 오는 대로 준다. 반환 대상은 각 상황에 따라 결정됩니다. 하나님께 돌려주어도 되고 부처나 스스로 되돌려도 된다. 반환하는 방법을 다시 설명하겠습니다.

 

과연 어려운 것은 다시 태어난 후다. 이때부터는 되돌리기가 어려운 것이 온다. 여기서 그 전에 연습한 복귀가 위력을 발휘한다. 공부하는 사람들이 자주 말하는 마경은 오히려 큰 문제가 아니다. 어울리지 말아야 할 대상임을 이미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정말 힘든 것은 평소 신앙대상이 현명한 경우다. 신, 부처, 신령과 조상이 나타나 법문을 하면 쉽게 빠지기 ​​어렵다. 그러나 궁극의 진리를 얻기 전에 그러한 대상자에게 마음을 빼앗기면 바로 십년간 공부의 도아미타불이 된다. 그래서 살불살번, 부처가 오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가 오면 조사를 죽인다는 말이 태어난 것이다. 오는 주는 방법, 돌려보내는 구체적인 방법은, 나중에 또한 설명하기로 하자. 여기서 강조하는 것은 모든 경우에 지켜야 하는 일반 원칙이며, 오는 대로 주지 않고는 연성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이다. 진리 믿음을 위해 연성의 첫 발판은 믿음이었다. 궁극의 진리라는 것이 있을 수 있고, 내가 거기에 도달할 수 있다는 확고한 믿음이 없으면 연성은 기대하지 않는 것이 좋다. 모든 종교가 믿음을 먼저 두는 이유는 믿음이 인간의 정신의 기초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태어난 뒤 최초로 형성되는 성정이 신앙이다. 부모가 지켜주고 주고 살려주기 때문에 태어나는 신앙은 인간으로 진화하기 오래 전 포유류의 진화 단계에서 태어난 성정으로 봐도 좋을 것이다. 그 때문에 신앙이 흔들릴 정도의 충격을 받으면 다른 정신활동, 즉 사랑, 시비분별, 예절, 지혜 등도 모두 왜곡되어 성격파탄이 일어나게 된다. 믿음이 없는 사랑은 탐욕과 의심에 불과하며, 믿음이 없는 예절은 권조의 수의 한쪽에 불과하며, 믿을 수 없는 시비의 분별은 아들과 독선에서 벗어나지 않고, 믿음이 없는 지혜는 임기응변하는 잔두에 불과하다. 신앙이 없으면 인간의 어떠한 정신작용도 바람직하게는 기능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종교는 믿음을 요구한다. 어떤 종교로 내거는 진리가 잘못되어도 강력한 신앙은 신앙인의 마음에 평화를 주고 신앙인의 삶에 활력을 줍니다.

 

수천 년 동안 종교가 통합되지 않은 이유는 종교에 없었습니다. 자신들의 발목을 풀고 진리와 하나가 될 수 없었던 신도들에게는 자신의 신앙대상과 다른 종교의 신앙대상이 완전히 다른 존재처럼 보인다. 하나의 북한산을 두고, 그 산의 남쪽 사람들은 북한산이라고 부르고, 북쪽의 사람들은 삼각산이라고 부른다. 그 산 남쪽과 북쪽 사람들이 금강산에서 만나고 삼각산과 북한산이 다른 산이라고 울고 있는 것은 종교인들과의 논쟁이 변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더 이상 진실 자체를 두고 싸우지 마십시오. 어떤 종교가 옳기 때문에 어떤 믿음을 가져야 하는지를 고안하기 위해 아쉬운 시간을 낭비하지 마십시오. 이를 위해 당신의 삶이 너무 짧습니다. 내일이 먼저 오는지, 그 선배가 먼저 오는지 아무도 모른다. 너는 믿어도 좋다. 진리는 이미 믿어도 좋을 만큼 다양하게 조리되어 식탁마다 솟아오르고, 당신이 데리러만 기다리고 있다. 당신이 우연히 앉아 있던 그 자리에 놓인 음식을 맛있게 먹고 즐겁게 사는 힘을 얻으십시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어떤 종교도 묵묵히 믿으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종교라도 궁극의 진리는 똑같고, 믿어도 좋지만, 그 진리를 널리 가르치는 과정에서 덧붙인 찌꺼기가 많다. 그 중에서는 연성을 방해하는 독소도 많기 때문에, 실수하면 당신도 또 논의자의 대열에 끼어들기 쉽다. 그만큼 진정한 연인은 우선 자신으로부터 믿어야 한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내 몸이 바로 성전이므로 내 안에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고 믿고, 석가의 말씀대로 모든 것이 마음의 조작이므로, 내 마음이 깨달음도 낳을 수 있다는 것도 철석처럼 믿어야 한다. 이 두 가지 신앙, 진리가 있고, 내가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는 신념만을 철저히 하면, 어떤 종교를 믿어도 좋다. 자신의 인연과 노력에 의해 빠르고 늦는 일은 있지만, 언젠가 당신도 연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 사는 이유 왜 사는가? 당신이 살고 있는 이유를 아십니까? 아마도 모를 것입니다. 죽은 각성 전에는 알기 어려운 것이 사는 이유다.

 

오늘 세계 종교로 성장한 고등종교들의 초창기 경전은 그 당시의 상식으로 보면 이상한 목소리였다. 예수님의 말씀이 얼마나 파격적이라면 그 시대의 최고의 지성인 랍비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노자의 말은 일반 상식을 완전히 뒤집는 말로 일관되고 있으며, 석가의 말도 어부성설이다. 사랑도 고통스럽고 즐거움도 고통스럽고 어떤 것이 곧 존재하지 않습니다. 과학도 어휘성설의 역사이다. 지동설이나 진화론이 그 대표적인 경우다. 아인시타인은 상대성 이론이라는 어부성설을 발표하면서도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라는 어부성설을 이해할 수 없었다. 진리는 이렇게 어휘성설로 세상에 나타난다. 그 중 시대에 맞는 어불성설, 그 시대에 사용할 수 있고, 그 사회를 사용할 수 있어야 하는 어불성설이 진리로 정착하고, 시간을 채운 어불성설은 잊혀져 매입된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 말이 옳다는 것을 확인한 사람들이 늘어나 지금은 상식으로 정착한 말도 있을 때는 어부성설로 다루어지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어부의 성설을 비난하지 말라. 당신이 어휘설에 도달하면 감사의 마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진리의 말을 이해하기 어려워도 진리를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연성을 포기하지 마십시오. 네가 어부성설을 쓸 수 있을 정도의 수준에 도달하지 않으면 진리의 말이 처음 숨겨진 빛을 드러낸다. 당신이 수영하는 법을 배운 후에는 물이 당신을 삼키지 않고 재미있는 놀이터가되는 것과 같은 원리입니다. 진리는 자연을 본뜬다. 그래서 진리의 또 다른 이름인 길이 자연을 법으로 한다고 표현한 말이 도법 자연이다. 그렇다면 자연은 무엇입니까? 사람의 손에 관계없이 존재하는 일이나 일어나는 현상을 보통 자연이라고 한다. 그런 자연은 한자의 말 그대로 스스로 또는 자연스럽게 그렇게 해 온 것이다. 사람이 살기 전부터 그렇게 해 온 것이 자연인 만큼, 노자가 진리가 자연을 본뜬다고 말한 것은 자연의 지위에 어울리는 설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연사상에서 말하는 자연 또는 인연도 일반적으로 자연이라는 말이 가리키는 현상세계를 가리킨다는 점에서는 그다지 차이가 ​​없다. 그러나 연사상의 자연은 인공적인 모든 것을 포함한 자연이다. 사람을 자연의 일부로 보고 싶지 않은 서양식 세계관과는 달리 강사상은 사람과 사람이 하는 모든 것까지 모두 자연의 일부로 본다. 연사상의 자연을 반드시 구별하여 노래해야 하는 경우에는 앞으로 연연하게 쓰기로 하자. 그러니까 그런 세상을 표현하는데 어울리는 말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연연은 인공을 포함한 전체 자연을 가리킨다. 존재하고 변화하는 모든 것이 연연이다. 존재하고 변화하는 모든 것을 가리키는 말이 이미 있는데 굳이 연연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나오는 데는 이유가 있다. 그 이유는 인간의 외부 환경으로서의 자연과 인간의 내면의 자연을 연결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내면, 우리의 정신 속에도 하나의 세계가 존재하고 있다. 그 세계는 우리 육체를 둘러싼 외부 세계에 못지않게 넓게 생생한 세계다. 그 내면세계는 우리의 정신작용을 통해 외부세계와 교류하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우리의 내면 세계가 얼마나 크고 넓고 얼마나 강력한 힘과 많은 잠재력을 가지고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모든 물체는 전체 우주를 감싸고 있습니다. 즉, 모든 개체는 나머지 우주 전체를 그 안에 넣고 있다. 탁구공의 내부는 공의 껍질에 갇혀 있지만, 그 탁구공의 내부는 우주 전체를 감싸고 있다. 이런 진실을 주자(추희)는 “물체마다 태극을 가지고 있다”고 표현하고 있다. 이 광대하고 무변한 인간의 내면 세계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방치하고 있는 세계이다. 이번 삶에 경험하고 기억된 것들 중에서 자주 사용되는 일부가 단어와 문장의 기호로 변환되어 인간 활동에 활용된다. 말이나 문장을 사용하는 빈도가 빈번해지고, 언어로 변하지 않는 기억은 거의 망각의 문 너머의 창고에 갇혀 버린다. 예를 들어, 한 사람이 제주도에 다녀온 신혼여행 중에 경험한 모든 것은 보통 신혼여행이라는 검색어로만 현실에 등장한다. 그 상세한 내용은 거의 거의 회상되지 않고 묻혀 있다.

 

그런데 사진이나 비디오 테이프에는 그 당시의 상황이 자세히 담겨 있다. 그래서 신랑신부는 신혼여행 중에 사진을 찍고 비디오 촬영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 그런데 자신의 마음 속을 차분히 거꾸로 들여다 보면 사진이나 비디오 테이프와는 비교가 되지 않도록 선명한 과거의 영상을 찾을 수 있다. 보통 사람들의 일반적인 추측과 달리 각 개인의 정신 중에는 과거 세계가 필름처럼 보관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보관된 과거 세계는 사진이나 비디오 테이프에 담긴 단순한 영상이 아니다. 최면 유도 능력이 뛰어난 최면술사는 최면에 걸린 사람이 사건 당시에는 보이지 않았던 ‘벽 뒤에 숨어 있던 사람의 모습’도 찾을 수 있다고 한다. 오랫동안 명상을 한 사람들도 과거 사건을 회상하면서 정확히 같은 능력을 보인다고 한다. 우리의 기억 속의 세계는 과거의 우주가 염주처럼 시간의 축으로 꿰매어진 실세계라고 생각할 수 있다. 즉, 우리의 내면세계는 우주 전체만큼 크다. 과거 세계가 통째로 보존되어 있으면 현실 세계보다 커야 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시간도 공간과 마찬가지로 미래는 과거를 감싸고, 과거는 미래를 감싸고 있기 때문에 과거 세계와 미래 세계도 크기가 같다. 현재의 세계는? 그런 건 없다. 과거와 현재가 서로를 감싼 그 경계선이 현재다. 그런데 우리는 언제나 바빠서 과거와 미래의 경계선인 현재의 세계를 만날 수 없다. 즉, 우리의 정신은 시간과 동행하지 않습니다. 과거로 돌아와 예일 사진인 추억을 따라가거나 미래를 따라잡아 설계도를 수정하는데 바빠서 현재를 방치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사실은 어려운 공식이나 논리로 증명할 필요조차 없는 영역이다. 당신이 지금 하고 있는 생각을 조금만 주의깊게 관찰해 보면, 곧바로 수긍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마음이 과거와 미래를 오가지 않고 시간과 전혀 함께 흐를 때, 마음이 지금 내가 살아 있는 지금 이 순간과 함께 할 때, 우리는 처음으로 과거에 의해 오염되지 않고 미래에 의해 왜곡되지 않은 본래의 자연을 만나게 된다. 이것이 연성이다.

 

하지만 사람의 고기가 그렇게 간단하지만, 아니고, 많이 알고 있기 때문에 생긴 문제도 결코 어색하다. 모르게 가면 아무것도 없는 성형수술을 받고 얼굴이 부러지는 경우나, 모르면 먹지 않는 마약을 먹고 인생을 망치는 것도 비일상재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연사상에서 아는 것이 병이라는 말은 엄청난 비중을 가진 진리다. 다만 단순한 삶의 교훈이 아니라 그 자체가 인간의 현실을 정확하게 묘사한 핵심 진리의 하나라는 것이다. 이 말을 제대로 이해하고 그 병만을 고치면 연성은 즉시 완결된다. 아는 것은 그렇게 큰 질병이다. 구체적인 내용은 잠시 연장해 두자. 여기서는 한 번 전체 윤곽을 살펴보니 이 병이 얼마나 큰 고질인지를 확인하는 것만으로 충분할 것이다. 아는 사람은 본래 인생의 진실을 가르치는 말이다. 사람은 고통을 통해 삶에 필요한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아늑한 어머니의 자궁을 떠나는 통증을 경험해 태어나 공복을 통해 어머니의 소중함을 아는 것이 인생에서 배운 출발점이다. 살면서 병에 시달리고 면역력이 생겨 상처를 입으면서 위험한 것을 알고 형제 자매와 싸우면서 친구와 만나서 헤어지고 경쟁하면서 사랑을 하고 헤어지면서 진학과 취직에 울며 웃으면서 인생이 어떤 것인지를 조금씩 알게 된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인생이 곧 나쁘다. 살아가는 것을 아는 것과 같고, 모르고는 살 수 없는 것이 인생의 진정한 모습이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알아야 했기 때문에 옛날에는 오래 살아온 사람들이 존경받았다. 아는 것은 단순한 지식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생활 그 자체였다. 그런데 석가는 인생이 고통이라고 설파했다. 고통은 다시 말하면 고통입니다. 인생이 왜 통증인지는 불교에서 소름 끼치게 되도록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인생의 진실에 대한 탐구는 실로 3천년 전에 이미 끝난 셈이다. 인생이 아파함과 동시에 아픔이므로 슬픔도 곧 아픔이다. 인생에 시달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알게 된다. 숨의 뿌리가 통증이므로 그 자체 안에 통증을 내포하고 있다.

 

아는 사람 가운데서도 인류에 가장 큰 해악을 끼친 병사는 이미 몇 번이나 몰입한 적이 있는 원죄설이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원죄설에는 아르곡이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불행이라는 진실이 밝혀진 셈이다. 사람이 지혜를 얻지 못했다면 에덴 동산에서 쫓겨나지 않았을 것이며, 낙원에서 영원히 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음 지금부터는, 인생과 동시에 병이 되는, 인간 존재의 가장 깊은 심연을 따라가 보자. ㅡ, 그것은 기억입니다. 우리가 아는 것은 우리가 기억한 것입니다. 이 말을 부정할 수 있는 사람은 매우 드물다. 없다고 말하지 않고 드물다고 말한 이유는 드물지만, 그런 사람들이 있는 것은 있기 때문이다. 이 장의 타이틀이 몰라 알 방법인 이유도 그런 사람이 있어 그런 사람이 되어가는 길의 연성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연성할 수 없었던 평범한 사람들에게 기억된 사물들이다. 어린 아이들이 가족의 얼굴을 익히고 말을 배우는 그 오랜 시간을 살펴보면 기억이 우리의 삶에 미치는 영향을 실감할 수 있다. 사람은 태어나기 전부터 기억을 시작한다고 한다. 어머니의 심음, 어머니의 심리 상태, 어머니의 주변 환경, 어머니의 일상생활에 이르기까지 어머니의 거의 모든 것을 배에서 기억하고 있다고 한다. 위에서 경험하는 기억은 보통 몸에 새겨져 있다고 볼 수 있다. 어머니의 건강과 심성이 태아의 심장의 고동과 내분비계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태아의 신체 조건이 결정되고 육체에 영향을 받는 성격도 태중에서 거의 형성된다고 볼 수 있다. 즉, 태아는 전신으로 세계를 체험한다. 따라서 태아에게 기억의 주요 재료는 전신입니다. 태어난 후에는 주로 감각을 통해 세계를 체험한다. 아기는 촉각을 중심으로 세계를 경험하고, 성장하면서 시각이나 청각 등의 다른 감각이 발달하게 되고, 그러한 감각 기관이 받아들인 정보가 기억의 주요 재료가 된다. 그 중에서도 현저하게 발달하는 것이 시청각이기 때문에, 우리의 지식의 대부분이 시청각에 의존하게 된다. 보고 듣지 않은 것은 거의 모르게 된다. 있어도 보이거나 들리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하는데 얼마나 힘이 걸리는지는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분명히 있는 것처럼 보일지도 들릴지도 만져도 냄새도 없기 때문에 모르고 살아가는 대표적인 것이 영혼이다. 제대로 수행한 사람의 지도를 받으면서 조금 연습하면 누구나 확인할 수 있는 것이 영혼임에도 불구하고 영혼의 존재를 인정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다른 사람의 말을 듣고 이름은 알고 있고, 그 이름(영혼)이 어떤 것을 가리키고 있는지는 알고 있지만, 자신의 감각으로 경험한 사물이 아니기 때문에 알 수 없다. 그렇다면 보고 듣고 느낀 모든 사물이 모두 슬프게 될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경험한 사물 중에서도 기억된 것만이 슬프다. 여러 번, 여러 번, 여러 번, 여러 번, 여러 번, 여러 번, 여러 번, 여러 번, 여러 번, 여러 번, 여러 번, 여러 번, 여러 번, 여러 번 경험을 반복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기억된 사물들, 정확히 말하면 사물들에 대한 기억인 것이 병이 된다. 없는 것을 갖지 않아서 고생하고, 버리고 싶은 것을 가지고 있어 괴롭고, 싫어도 떠나지 못하고 괴롭고, 좋아해도 떠나야 하는데 힘들다. 더 알수록 알수록 더 많은 질병이 인간의 존재 상황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모르는 사람을 좋아합니다. 자신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만을 알게 된 소크라테스나 아는 것도 얻지 못한 깨달음을 얻은 석가나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따라서 모르는) 노자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넘어 사랑받는 이유도 슬픔을 극복했는가? ㅡ 기억은 한정된 자연 통증이 통증을 낳는 유일한 이유는 기억이 통증을 통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렇게 말하면 무리하게 지식을 습득해야 하는 학생들이 가장 많이 공감할 것 같다. 자신이 하고 싶어하는 일도 힘들지만 공부하지 않은 것이 한이 된 부모님의 성화에 노출되어 공부하는 한국 학생들의 암기 중심 공부는 고역 중 고역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한 기억만이 아파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아는 모든 것이 기억되는 과정은 항상 고통스럽다. 그 통증은 자연을 제한하고 자연과 분리하는 통증입니다. 우리가보고, 듣고, 냄새, 맛, 몸을 만지는 모든 느낌은 느껴지는 그 순간에 자연입니다. 여기서 자연스럽다는 말의 의미는 생각에 의해 변질되지 않은 현상의 감수작용이라는 말이다.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하려고 할수록 어렵고 복잡한 심리학이나 철학 용어만을 열거하게 되므로 알기 쉽게 예를 들어 설명하자.

 

그러나 지금 당신은 천지 창조의 과정을 잊어 버렸기 때문에 그러한 능력을 쓸 수 없습니다. 당신이 자아의 허상에서 벗어나 자연의 장난을 휘두르지 않을 때, 가장자리를 그렇게 되돌릴 때, 천지는 처음으로 당신의 마음대로 돌아갑니다. 그 때, 당신은 모르고 알고 있는 것, 괴롭지 않고 알고 있는 일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하지 않는다는 우주경영이 가능하다는 사실도 확인하게 된다. ㅡ, 알고 바쁘다 그러나 당신은 상쾌한 연성의 길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 첫 번째 이유는 연연이나 자연을 모르기 때문에 너무 막연하게 어떤 길을 어떻게 가야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이유는 어디까지나 변명에 지나지 않는 것을 쉽게 수긍할 수 있을 것이다. 연연은 너자신으로 나와서 빠졌다고 생각하려고 해도 벗어난 적이 없는 너자신이다. 그래서 달라 길을 찾는 것 자체가 우습이다. 다른 일을 하지 않으면 연성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이 연성을 시도하지 않는 또 다른 이유는 너무 바빠서 시간이 걸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자아로 표현한 신도 당신과 사정이 비슷하다. 연연을 나누고 나서 갑자기 일어난 광대무변한 우주를 관리하기 위해 너무 바빠서 연연으로 복귀할 기회가 없다. 자아는 자연을 단지 2개로 나누었을 뿐이지만, 우주는 모든 장소가 중심이기 때문에 실제로는 헤아릴 정도로 많은 조각으로 나뉘어 버린다. 단 한번의 분할로 우주에 있는 모든 존재가 한번에 태어나는 것이다. 그래서 자아가 보면 연연도 무수히 많다. 그 많은 존재를 모두 관리하도록 너무 바빠서 자아도 연연으로 복귀할 수 없다. 당신이나 자아나 사정이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생활의 특성은 성장하고자 하는 속성이다. 생명 있는 모든 것은 사랑을 바란다는 말도 맞지만 그 뒤떨어지지 않는 본성이 자라고 싶다는 욕구다. 이 욕망은 모든 생명체가 본질적으로 우주 전체를 내 몸으로 가지고 있는 것에 나타나는 자연적인 본능입니다. 사람의 끝이 없는 욕심은 우주 전체를 되찾으려는 욕심이며, 이 본능은 자연과 하나가 되기 전에는 끝나지 않는 가장 근본적인 욕망이다.

 

보다 쾌적한 생활을 위해서 또 하나를 알면, 그 전에는 나에게 속해 있던 나의 일부 중에서 또 하나 떨어져 간다. 하지만 사고는 하나라도 더 알기 위해 몸을 굽히면서 바쁘게 날아갔다. 잃어버리는 부분은 인식하고 기억하지 못하지만, 하나를 알면서 통증이 적어진 사실은 인식되어 기억되기 때문이다. 결국 알수록 당신은 더 바빠지고, 그만큼 당신은 더 불행해집니다. 당신의 본연으로부터 그만큼 멀어지기 때문이다. ㅡ, 상을 없애려면 “고생하고 무거운 짐진인이야, 모두 나에게 오세요. 예수께서 자신의 동족에게 외쳤던 구원의 메시지 중 하나입니다. 원죄에 밀려 폭정에 시달리는 것도 부족해, 로마 제국의 침략까지 받고, 바로 죽지 못하고 살고 있던 유대 민족, 한일 합방 전후의 조선민중처럼 살아간 그들에게 있어서, 예수의 복음은 가뭄의 끝의 처녀인 것 같았다. 그래서 그들은 가장 무거운 짐을 예수께 보여 주었고, 대부분은 육체적 질병이었습니다. 소경이 눈을 뜨고 앉은 반이가 일어나 문병이 좋고 유령이 들어간 자가 정상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천국의 복음을 가져온 예수께서 말씀하신 무거운 짐이 그런 육체적 고통이었을까. 내가 보는 것은 그런 일이 없다고 판단된다. 천국에 가기 위해서는 어차피 버려야 하는 육체의 질병은 예수의 관점에서 그다지 무거운 짐이 아니었을 것이다. 예수께서 가져오겠다고 말한 무거운 짐은 원죄의 죄 의식과 살아가기 위해 쌓은 수많은 지식, 즉 천국에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버려 가야 할 마음의 짐이 아니었을까. 그래서 아이처럼 순수하게 가르치고 공중의 새와의 백합처럼 내일의 일을 신경쓰지 않게 외쳤을 것이다. 그러니까 야마가미미즈의 첫 머리가 ‘마음이 가난한 자는 축복이 있을까……’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곧 복음에 어울리는 영혼을 만날 수 없었다. 예수께서 오기 전 수천 년 동안 선지자들이 예언한 메시아의 힘에 깊게 세뇌된 유대인들은 예수께 심판을 통해 자신들을 구했고, 적국은 멸망시켜 주는 것만을 요구했을 뿐 복음의 실천 방법은 묻지 않았다.

 

확실히 유감스러운 일이다. 신약성경의 복음서에 마음의 가난을 실현하는 방법이 추가되면, 로마 제국에 소크라테스 이후 더 이상 발전하지 못한 무지의 땅이 부활할 수 있었을 것이며, 예수께서 보여 주신 능력을 늦추고 추측했을 때 동양에서 개화 불교 문화와 쌍벽을 이룬다. 그렇다면, 기독교인들도 유대인이 기독교로 개종해도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았을 것이고, 유대인에게 가해진 박해도 유난하지 않았을 것이고, 오늘과 같은 멸망의 위기도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다행히 오늘날 우리에게는 예수를 체포하고 죽인 유대인과 같은 원죄의 무거운 부담이 없습니다. 다른 종교인들은 원죄 자체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문제가 되지 않으며, 기독교도도 예수께서 원죄를 구속하니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래서 먹고 살면 쌓아온 지식의 짐만 내리면 공중을 날아가는 새의 백합처럼 불안이 없어져 천국에 갈 수 있는 아이처럼 가난한 마음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불행히도 이런 생각은 지나치게 희망적인 백일몽이다. 지금 우리가 짊어진 마음의 짐은 당시 유대인보다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아인시타인의 신창세기 해독, 즉 과학적 사고 방식은 원죄설에 못지않게 무거운 짐이기 때문이다. 당신이 과학적 사고 방식의 속박에서 벗어나지 않고, 당신 자신의 자업 자득이다. 상을 없애는 구체적인 방법인 되돌아보기를 조사하기 전에 과학적 사고방식의 문제점을 설명하는 것은 하지만 그 짧은 설명이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 나도 장대하지 않다는 것이다. ㅡ 과학의 허상 현대과학의 발달은 눈이 망가지기 어려울 정도다. 수백년 전만 해도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며, 땅이 사각형이라고 생각했던 인류가 건설한 문명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과학은 급속히 발전하고 있다. 그러므로 현대인에게 있어서 과학은 무소불위의 절대 진리처럼 보이고 비과학적인 생각은 입지가 없다. 사회학과 철학, 종교학까지도 과학적 연구 방법을 도입할 정도이기 때문에, 다른 영역이라고 말해 무엇을 할 것인가!

 

하지만 과학은 완전히 올바른 진리도 아니고 인류에게 도움이 되는 학문도 아니다. 과학이 낳은 많은 문제점은 과학을 재검토할 필요성을 나타내는 조짐이다. 과학을 믿는 사람들은 과학만이 인류를 궁극의 진리로 이끌어 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과학은 실험을 통해 검증된 이론만이 살아남기 때문에, 잘못된 이론은 자연 도태되고 진리만이 살아남을 것이라는 예상이 그러한 신앙의 근거가 된다. 그러나 과학에 대해 조금만 연구해 보면, 그러한 신앙이 얼마나 허황해졌는지를 알 수 있다. 왜냐하면 과학의 성립 기반 자체가 아직 확인되지 않은 가설적 명제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수학이다. 과학은 수학을 기반으로 수행됩니다. 수학을 빼면 과학에는 남는 것이 없다. 그러나 수학의 가장 기본적인 명제는 진리가 아니라 약속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음수, 정확하게 말하면 음의 정수이다. 0은 아무것도 없음을 나타내는 숫자입니다. 없는 상태에서 또 하나를 없애는 것이 인가? 아니면 하나를 더하지 않은 상태를 없애는 것이 인가? 음수에 음수를 곱하면 양수입니다. 완전히 악마 놀이다. 부수가 무엇일지도 모르지만, 그런 것을 곱하는 것도 신기하지만, 걸면 갑자기 정수가 나온다. 이제 한 잔으로 제곱해 1이 되는 수인 허수에 이르면 이는 학문이 아니라 수제 악마 놀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수학에서 말하는 제로(제로)가 기준이라는 사실 정도는 나도 알고 있다. 그렇다면 기준이 있습니까? 아니면 없습니까? 이러한 문제는 수학 자체에서도 아직 논의의 거리라고 알고 있다. 현대과학에서는 당연히 받아들이는 미적분을 근대과학의 거장인 뉴턴은 죽을 때까지 이해할 수 없었다고 한다. 1에 무한하게 접근하는 수(999......)를 1로 해서는 안 된다는 그의 생각이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수학자는 없다. 대부분의 수학자가 동의했기 때문에 미적분이 사용되고 있을 뿐이다. 기하학에서 사용하는 각도도 현실적인 근거가 없는 단순한 약속인 것과 같다. 원의 각도가 360도가 되어야 하는 이유는 없다. 단지 옛날부터 그렇게 썼던 것을 받아들이고 쓸 뿐이다.

 

이처럼 불완전한 개념 정의 위에 세워진 과학이 절대적인 진리를 규명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게다가 현대과학은 그 태동으로부터 절망으로 시작되었다. 근대과학이 형성된 중세유럽은 기독교의 절대적 권위가 지배했던 사회였으며, 성경의 가르침을 위반하는 모든 학설은 이단에 규정되어 배척되었고, 그러한 주장을 하는 학자들은 처벌되었다. 그리고 과학자들은 누구에게나 보여줄 수 있는 물질적 현상만을 연구했고, 그러자 인간의 정신은 연구 대상에서 처음부터 제외되었다. 그런데 과학이 눈에 보이지 않는 극미의 세계를 관찰할 수 있게 되면, 관찰자의 생각이 실험 결과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런데 잘 생각해 보면, 그 전부터 관찰자(과학자)의 생각은 실험 결과를 좌우하고 있었다. 실험 조건이 같으면 같은 결론이 나온다는 전제 자체가 그것이다. 조건을 설정하는 과정 자체에 과학자의 의지가 개입된 것이다. 따라서 과학자들이 늦게 이 사실을 뚫는 것은 정신영역도 더 이상 과학의 영역밖에 두지 않는다고 선언하는 승리의 트럼펫에 불과하다. 그러나 지금까지 과학이 물질 중심으로 발전해 왔기 때문에 과학이 정신을 연구 대상으로 하는 것은 너무 위험하다. 인간의 정신을 물질적 관점에서 연구하면 물질적 결론이 나올 수밖에 없다. 현대과학은 실제로 인간 정신이 인공지능 컴퓨터와 별로 변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다. 뇌파가 멈춘 상태의 인간 정신은 현대 과학에서 관측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그러한 경우 정신적 관점을 중시하면 인간에게는 비물질적인 측면이 있다는 결론이 내려지고, 물질적 관점에서 판단하면 사람이 죽으면 정신작용은 소멸한다는 결론이 내려질 것이다. 두 결론의 차이와 그 파급 효과를 얼마나 추측할 수 있습니까? 당신이 그 백분의 일만을 추측할 수 있어도, 지금 「과학 반대」라고 쓴 피켓을 가지고 광화문이나 여의도에 달리고 싶어질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보다 긴급하고 효과적인 대처방안이 있으므로, 그런 생각이 나와도 일단은 밀어 둡시다. 그런 시위를 해도 제대로 하려면 먼저 자신의 저신을 확실히 이해해야 한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말도 시대에 뒤떨어진 몽상가의 불평이 아니라는 증거도 없기 때문이다. 되돌아가다 ㅡ, 밖에 진실이 없다. 진리 탐구에 의지를 둔 사람들은 근면하게 스승을 찾아 돌아다닌다. 학교에 가서 공부하고 교회나 사원에 가서 설교와 설법을 듣고 시키도록 기도하거나 참선하면서 진리를 얻기를 바란다.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것이 사람이 태어나면서 성장하는 과정에서 필요한 모든 것은 밖에서 주어졌기 때문에 진리도 밖에서 주어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다른 모든 것은 밖에서 얻을 수 있지만 진리만은 밖에 없습니다. 지식은 밖에서 얻을 수 있지만 진리는 밖에서는 얻을 수 없다. 진리는 본래부터밖에 없기 때문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밖이라는 것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해야 하지만, 이다. 인공위성이 지구의 사진을 찍어 와 천체망원경으로 다른 항성의 행성까지 관찰하는 시대에 어떤 망상인지 웃지만, 당신이 보고 듣고 느끼는 모든 것은 당신의 내면 세계다. 당신의 생각이 당신의 피부 밖에 있는 것을 밖으로 착각하는 것만으로, 존재하는 모든 것은 당신의 내면에 있는 것 중에서 당신이 선택한 빼낸 허상에 지나지 않는다. 당신은 꿈속에서 진짜와 변하지 않는 세상을 경험합니다. 그 세계가 실재하는가? 우리의 현실 세계가 꿈 속의 세계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장자는 당신이 이해해도 남을 만큼 실감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불교의 금강경에도 있는 모든 것이 꿈같고 물의 거품같고 참깨같고 그림자같다고 가르친다. 나가코나 석가의 말이 단순한 비유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런 생각이야말로 천만의 말이다. 당신이 명상을 해보면 과거를 거슬러 올라가 체험할 수 있다. 그 과거는 차례만 거꾸로 되는 것만으로 실제 상황 그대로이다. 그리고 과거의 어느 시점까지 가고 나서 현재로 돌아가는 과정은 현실과 조금도 변하지 않는다. 명상상태는 현재의 의식이 잠재의식과 융합되어 있기 때문에 명상 중에 자신이 경험하고 있는 것이 실제 사건이 아니라는 사실을 스스로 알고 있다는 점만 다를 뿐 나머지는 현실 그대로이거나 현실보다 선명하고 복잡하다.

 

그래도 명쾌한 결론을 내릴 수 없는 이유는 쿼크 종류가 너무 많기 때문이라고 한다. 양자와 전자와 중성자로 나뉘어진 원자 모델이 보다 쉽게 ​​명확했다고 하고, 쿼크의 종류가 그렇게 많은 이유를 설명하기 위한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과학자들이 부딪힌 한계를 넘는 방법은 없을까. 그렇지 않다고 생각된다. 물질이나 물체에 대한 생각 자체를 바꾸면 된다. 개체는 독립적인 개체가 아니라 전체 공간의 특수한 부분입니다. 잘 알려진 사실을 다시 떠오르자는 의미는 아니다. 이 사실을 말하기 위해서는 전시공간에 대한 이해를 다르게 할 필요가 있다. 한국의 철학자 김상일 선생님은 한철학이라는 책에서 복지 팔암과 정역 하치만이 뫼비우스대와 클라인병을 만드는 방법과 같은 원리로 그려져 있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다. 과학자들은 우리가 살아가는 시공간이 뒤틀리고 있다고 추측하고 있지만, 어떻게 꼬여지는지는 아직 밝히지 않았다. 그런데 동양의 주역은 3천년 전, 정역에서는 100년 전에 이미 시공간의 뒤틀린 원리를 부호로 나타내었다. 진리는 이미 충분히 밝혀졌다는 내 주장이 옳다고 믿을 수 있다. 뫼비우스 띠와 클라인병을 검색창에서 찾아 쉽게 소개한다. 뫼비우스 스트립(Mobius Strip): 좁고 긴 직사각형 종이를 180도 비틀어서 가장자리가 달린 곡면. 위상 기하학적 성질을 가진 곡면으로서 독일 수학자 아우구스트 페르디난트 뫼비우스가 처음으로 제시하였다. 이 띠의 특징은 눈과 밖의 구별이 없다는 점이다. 즉 곡면상의 바깥쪽에 칠을 해 나가면 안쪽까지 모두 바른다. 또, 이 띠의 중심선을 따라 자르면 4번 비틀린 띠가 되어, 원래의 크기의 2배가 된다. (군아놀자에서) 클라인병: 독일의 수학자 펠릭스 클라인을 따서 명명된 비틀림 때문에 원통면의 양단을 반대 방향으로 결합하여 얻어지는 위상 공간. 표면을 3차원의 유클리드 공간에 작도할 수는 없지만, 뫼비우스대와 같이 일면이 된 재미있는 성질을 가진다. 닫혀 있지만, 환상체나 구와 같이 내부를 가지지 않고 적절하게 2개로 자르면 2개의 뫼비우스 밴드를 얻는다. (백과 사전)

 

클라인 병(甁, Klein’s Bottle): 뫼비우스의 띠처럼 외측과 내측을 구별할 수 없는 단측 곡면의 일례. 클라인 표면 또는 클라인 튜브라고도합니다. 이 병을 만들 때는 먼저 직사각형 ABCD(얇은 고무판과 같은 것으로 상상한다)의 A와 B, C와 D를 겹쳐 AD, BC를 맞추어 원관을 만든다. 다음으로 이렇게 만들어진 원관을 한번 비틀어 A와 C, B와 D를 겹쳐서 AB, CD를 붙인 후, 원관의 곡면에 구멍을 뚫어 넣어 양단(입구)을 접속시키면 된다. 이것은 3차원 유클리드 공간 내에서는 실현할 수 없다. 이 병에서는 병의 양쪽 끝이 연결되어 있다는 점에서 분명히 닫혀 있지만 사실은 열려 있습니다. 독일 수학자 F. 클라인이 고안한 이 병의 용도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지만, 그 이유는 액체를 넣으면 흐르기 때문이다. (공무원 정보 마담) 앞으로 이해가 잘 되지 않는 말이 나오면 검색창에서 찾아달라. 내가 설명하는 것보다 상세하고 정확한 정보를 얻을 수 있습니다. 어쨌든 뫼비우스 링은 앞과 뒤가 나뉘지 않은 평면의 모습을 보여주고, 클라인 병은 뫼비우스 링의 입체형으로 안과밖에 없다. 어떤 점에서 출발하여 앞으로 나아가면 표와 안을 일주하여 제지리로 복귀한다. 그런데 클라인병을 실제로 만들어 보면(열정적인 사람이라면 고무호스로 만들어 볼 것이다), 우리가 사는 3차원 공간에서는 관 중 하나를 열지 않으면 클라인 원통을 만들 수 없다. 아마 4차원 공간에서는 구멍을 열지 않고 클라인 원통을 만들 수 있다고 추측되지만, 사람은 4차원 공간을 인식할 수 없기 때문에 결국 물체의 내외가 분리되어 버린다. 클라인 병을 만들 때 반드시 만나는 이 벽은 우리가 현실에서 보는 모든 물체의 표면에 해당합니다. 그러므로 이 벽을 부수는 것만으로 그 너머로 우리는 우주 전체를 만날 수 있게 된다. 즉, 물체 내부에는 우주 전체가 들어 있다. 그래서 러너가 “모든 물체마다 하나의 태극을 안고 있다”고 말한 것이다.

 

현대물리학은 동양사상이 이미 오래 전에 발견한 음양 중삼원을 발견했을 때 이미 물질의 궁극에 도달한 것이다. 즉, 양자와 전자와 중성자로 이루어지는 원자가 물질의 궁극이다. 그 가운데 발견된 원자핵 내부는 클라인 벽에 구멍을 뚫어 본 우주의 저편의 모습이며, 당신이 잘 돌아보지 않는 당신의 뒷면의 모습이다. 사정이 이것이라면 궁극의 소립자를 찾으면 귀중한 돈과 시간을 낭비할 필요는 없다. 그 벽을 부수지 않고 물건의 내면에 도달 할 수 있다면, 그 방법을 찾는 것이 순리적입니다. 그리고 그 방법이 되돌아 간다. 물리적인 방법으로는 들여다 볼 수 없을 때부터 물체의 내부를 생각해 그것을 찾아내려고 한 정신의 숨은 힘, 그것이 물건의 내면에 도달할 수 있는 간단하고 쉬운 방법이다. 우리 몸 자체가 물체의 속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 몸은 벽의 역할을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내부를 들여다 보면 거기에서 우주 전체를 찾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내 몸을 찢는 것은 과학자들처럼 유치한 일이다. 우리의 몸 표면을 경계면으로 일하는 정신의 속성, 그것이 우리의 진정한 내면입니다. 양심적인 과학자라면 지금 외부 세계의 탐구는 중단하고 자신의 내면 세계를 탐구해야 한다. 인류를 멸망시킬 수 있는 과학기술이 개발된 경우, 그 기술을 제어하는 ​​확실한 방법이 발견될 때까지 파괴의 기술은 더 이상 개발해야 하는 사람다운 사람이다. 그날까지는 물질의 궁극을 탐구하는 연구는 중단하고 이미 개발된 기술을 평화적인 산업에 응용하는 기술과학과 발전시키고 나머지 열정은 자신의 내면탐구에 투자하는 것이 과학이 진행해야 할 올바른 발전 방향이다. ㅡ 고대의 되돌아 상을 없애고 본래의 성격을 회복하는 연성의 방법인 뒤돌아보는 것은 매우 먼 옛날부터 널리 알려진 수행법이었다. 그 중에서도 되돌아보기를 가장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는 것이 불교 수행법이다. 불교의 수행법에도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 중에서도 위파사나가 여기서 소개하려는 고대의 되돌아온다. 소개한다고 말한 이유는 앞으로 설명할 내용이 다른 이논문에서 발췌하여 정리한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위퍼 사나를 하고 싶은 사람은 좋은 자료 카테고리에 스크랩해 둔 문장을 참고하면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신념처를 신경쓰는 일차적인 대상으로 하는 이유는 육체에서 일어나는 현상이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보다 거칠고 눈치채기 쉽고 변화도 느리기 때문에 심집중 수행의 기초가 없는 초보자가 마음을 집중하는데 비교적 쉽기 때문이다. 앉는 자세는, 여러가지 앉는 방법을 시도해 보고, 가장 편하게 길게 앉을 수 있는 자세를 스스로 찾아 몸에 익힌다. 호흡은 자연스럽게 만든다. 단전 호흡이나 특별한 호흡법은 위파사나 수행과는 관계가 없을 뿐만 아니라 의도적인 호흡은 수행에 방해가 된다. 1. 자연스러운 숨과 호흡에 따른 복부의 움직임에 마음을 두는 것. 2. 숨에 따라 복부가 불러오면, 「일어난다」라고 마음속에 눈치채는 것. 3. 호흡에 의해 복부가 사라지면, "사라진다"라고 마음속에 눈치채는 것. 4. 복부의 일어나기와 사라짐에 따라 생기는 복부의 감각을 주의 깊게 조사한다. 5. 어떤 감각이 있었는지 기록해 두고, 눈에 띄는 현상을 간단, 명료하게 보고하는 것. 6. 복부의 일어나기. 사라짐에 주의하고 눈치채는 도중에 자연스럽게 어떤 생각이나 몸의 느낌이 생기면 그 순간 파악하는 것. 파악한 후,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를 보고할 것. 7. 식사 세면 목욕 등의 다른 동작과 한 동작에서 다른 동작으로 옮길 때의 마음 상태(의도)와 몸의 움직임도 놓치지 말고 눈치채는 것. 일상적인 행동을 할 때도 마음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감정은 잠에서 깨어 자고 있을 때까지 끊임없이 이어야 한다. 일상적인 동작을 하는 경우에는, 가장 현저한 동작을 알아차린다. 밥을 먹을 때에는 손 동작에서 음식을 씹는 동작, 삼키는 동작 등으로 순간 순간의 두드러진 동작이 심장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수행의 핵심은 끊임없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 즉, 한순간의 방심도 없이 자신의 몸과 마음으로 일어나는 현상을 관찰하는 것이다. 또한 집중 수행 기간 중에는 법문을 듣거나 점검 때를 제외하고는 침묵(고귀한 침묵)을 지켜야 한다. 일상적인 언어활동은 마음을 집중시키는 데 장애가 되기 때문에 묵언하면서 단지 자신의 마음과 몸으로 어떤 일이 일어나 사라지는지를 철저히 파악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가장 근본적인 번영인 탐욕과 분노 그리고 어리석음이 발생하는 것은 감정에 의한 것이므로 감정에 대한 심리는 중요하다. 쉬지 않고 몸과 마음으로 일어나는 느낌을 끊을 수는 없다. 하지만 느낌으로 생기는 번뇌는 마음을 다해 다스려야 한다. 연기의 초기 단계에서는 좋은 느낌보다 아프고 싫은 느낌이 강하게 일어날 것이다. 특히, 좌선 때에는 다리나 등에서 통증을 느끼게 되고, 더위와 가려움 등의 싫은 느낌이 일어날 것이다. 이런 느낌이 일어나면 ‘통증’, ‘통증’, ‘가려움’, ‘가려움’하면서 눈치챈다. 이렇게 깨달아 사라지는 느낌이 있을까 하면 잠시 지속되는 느낌도 있다. 지속되는 느낌에 대해서는, 1, 2회 눈치채고 나서, 1차적인 마음의 몸집의 대상으로 돌아오는 것을 권한다. 다양한 감각이 같은 강도로 일어날 때는, 스스로 선택해 깨닫습니다. 심취는 사소한 동작에도 항상 밀착하여 수반해야 한다. 느낌에 대한 감정을 통해 탐사 가치의 번영이 일어나는 것을 방지해야합니다. 이것이 문지르거나 실드로서의 감정이다. 기분 나쁘다는 문번이 없으면, 탐진치의 번뇌가 마음의 주된 버릇을 하게 된다. 위파사나 수행에서 번뇌에 대한 대립법은 간단하다. 어떤 번뇌가 생겨도 생기는 그 순간에 곧 알아차리는 것이다. 기분 나쁘다는 방패로 모든 번뇌에 대처한다는 의미다. 번뇌가 가능하면 제거하려고 하는 것보다는 조심하려고 해야 한다. 수행의 초보 단계에서는 번뇌의 힘이 강하고 심장의 약점이 약하기 때문에 수행 자체가 쉽게 진행되지 않는다. 무리하게 번뇌와 정면에 닿지 않도록 마음의 함정을 갖도록 노력하십시오. 기분이 강해질수록 번뇌의 격렬한 파도는 서서히 가라앉을 것이다. 우리가 무언가를 그대로 이해하려고 할 때, 그것에 대해 분석하지 않고, 논리적으로 생각하지 않고, 철학적으로 생각하지 않고, 선입관없이, 그것이 실제로 발생하는대로 관찰하고, 지켜보고, 알아 차려야합니다. 우리는 매우 신중해야 하며, 그대로 그 대상에 대해 마음을 잡아야 합니다.

 

편차 (자유)는 (도전과 자극에 대한) 반사 작용이 아니며 자유는 선택이 아닙니다. 사람이 선택을 하기 때문에 자유라는 것은 그의 허식이다. 자유는 방향이 없고, 상반되는 공포가 없는, 순수한 관찰이다. 자유롭게는 동기가 없다. 자유는 인간의 진화 과정의 끝에는 없으며, 그 존재의 첫걸음 안에 있다. 잘 관찰해 보면 우리는 자유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자유는 우리의 일상적인 존재와 활동에서 선택이 없는 가운데 자각함으로써 발견될 수 있습니다. 생각(사고)은 시간이다. 생각은 시간과 과거에서 분리할 수 없는 경험과 지식에서 태어납니다. 시간은 인간의 심리적 적입니다. 우리의 행위는 지식과 시간을 기반으로 하므로 인간은 항상 과거에 잡힌 노예가 됩니다. 생각은 항상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끊임없는 갈등과 투쟁에서 살고 있습니다. 자신의 사고의 움직임을 알기 시작하면 인간은 사고의 주체로 생각하고 관찰자와 관찰 대상, 경험과 경험자 사이에 분리가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이 분리가 망상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때야말로 겨우 지나거나 시간의 그림자가 떨어지지 않는 통찰, 즉 순수한 관찰이 태어난다. 초시간적인 이 통찰은 마음속에 깊은 근본적인 변전을 일으킨다. 총체적 부정이 곧(그 후 나타나는) 긍정적인 것의 본질이다. 사고가 심리적으로 불러일으킨 모든 것이 부정되면 그때 처음으로 (긍정적인 차원을 대표하는) 사랑이 나타나고 사랑은 자비로 지성이다. 이 기사는 크리슈나 무르티 자신이 직접 에 쓴 것으로 그의 가르침의 본질을 밝혔다. 그의 수행법은 수동적인 수험에 요약되어 있으며 자기로부터의 혁명이라는 책에서 해당 부분을 직접 소개한다. 자신을 아는 것은 나와 세계의 관계를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관념과 인간의 세계뿐만 아니라 자연과 우리가 소유하고있는 것과의 관계를 아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삶입니다. 생활은 전체와의 관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관계를 알기 위해 전문 지식과 기술이 필요합니까? 물론 필요 없습니다. 필요한 것은 삶을 전반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예민한 주의력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주의력을 집중할 수 있습니까? 또한 어떻게 생활을 전반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까? 그렇다면 어떻게 주의 깊게 관찰하고 대상을 정확하게 인식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어떻게 대상을 인식하고 있는가? 당신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어떻게 의식하고 있습니까? 나무와 새의 소리를 어떻게 의식하고 있습니까? 신문을 읽을 때 자신의 반응을 어떻게 알고 있습니까? 자신에 대한 인식은 자타가 관련된 행위 중에서 명확하게 시험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말과 행동으로 테스트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당신을 다른 것들과 동일하게 만들거나 비교하거나 비판하는 것을 피하고 자신을 조심스럽게 관찰하십시오. 차분히 관찰하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놀라운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때 당신은 무의식의 행위를 끝낼 뿐만 아니라, 우리의 행위의 대부분은 무의식 때문입니다. 연구하거나 파고들지 않고 그 행위의 동기를 알 수 있게 됩니다. 조심스럽게 관찰하면 사고와 활동의 전체 활동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일이 가능한 것은 당신이 관찰하는 대상을 결코 비판하지 않을 때에 한합니다. 내가 대상을 비판하면 나는 그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비판은 이해하는 것을 피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보통 이런 일을 고의로 하는 것이 아닐까요? 조속히 상대를 비판하고, 그래서 이해해 버린 것 같습니다. 우리가 대상을 비판하지 않고 그것을 존중하고 조심스럽게 관찰하면 그 행위의 진정한 의미가 자연스럽게 나타납니다. 이런 것들을 직접 시도해보십시오. 그러면 스스로 그것을 알게 됩니다. 정당화한다는 의도를 가지지 않고, 단지 지켜보는 것입니다. 이런 일을 꺼려한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와는 반대로, 그 자체가 직접적인 행동이며, 또한 일종의 수동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당신이 이것을 시도하면 항상 그 실상을 발견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보통 그 문제에 해석을 하지 않고 그것을 수동적으로 바라보면 문제 자신이 입을 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감정적이지 않고 문제를 볼 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문제로부터 결과나 대답이나 결말을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또는 우리의 기쁨과 슬픔에 따라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문제의 취급 방법에 대해 미리 해답은 준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문제입니다 문제는 항상 새로운 것입니다. 에 대한 오래된 형식으로 액세스하려고합니다. 외부의 도전은 언제나 새로운 것이지만 우리의 반응은 항상 오래된 것입니다. 우리에게 어려운 점은 외부 도전에 적절하게, 즉 완전히 대응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항상 사물과 사람과 개념의 관계 문제입니다. 이러한 관계적 문제 이것은 끊임없이 다양하게 변화하는 요구를 수반한다. 정확하고 적절하게 대응하려면 수동으로 시험해야합니다. 이 수동성은 결의나 훈련의 문제가 아니다. 첫째, 우리가 수동적이지 않다는 것을 자각하는 것이 출발점입니다. 우리가 특정 문제에 대한 특정 대답을 기대한다는 것을 아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우리와 그 문제와의 관계. 그 문제에 대한 우리의 처리 방법을 알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문제와의 관계 속에서 우리가 자신을 알기 시작했을 때, 즉 그 문제에 대응하고 있는 과정에서 우리가 어떻게 반응하는지, 우리의 편견이나 욕구, 혹은 추구하고 있는 것이 어떤지를 알기 시작했을 때, 이 자각이 우리의 사고 과정이나 우리의 내부의 본질을 열어 보이게 됩니다. 그리고 여기서 해방이 이루어집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선택하지 않고 시험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선택을 하면 지력을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선택하는 사람은 혼란스럽습니다. 혼란스럽기 때문에 선택합니다. 만약 그 사람이 혼란스러워하지 않으면 선택할 여지가 없을 것입니다. 혼란스러운 사람만 해야 하거나 하지 말아야 합니다. 명확하고 소박한 사람은 선택하지 않습니다. 그냥 남아있는 것이 거기에 있습니다.

 

관념에 따른 행위는 필연적으로 선택에 의한 행위입니다. 이러한 행위는 인간을 해방하지 않습니다. 그 반대로 조건화된 사고 때문에 더 이상의 저항과 투쟁을 불러 일으킬 뿐입니다. 중요한 점은 다음과 같습니다. 수험함으로써 일어나는 경험을 기억 속에 축적하지 않고, 언제나 순간 순간을 주의 깊게 보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신이 경험을 축적해도, 그 축적이나 패턴이나 경험에 의해 물건을 관찰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눈은 그 축적에 의해 조건화되어 버리기 때문에, 그 때문에 이미 대상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번역하고 있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번역하여 선택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선택은 투쟁을 창조합니다. 투쟁에서는 결코 이해할 수 없습니다. 삶은 관계의 문제입니다. 그리고 정적이 아니라 이 관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유연하고 적극적인 것이 아니라 걱정하지 않는 수동적 주의력이 필요합니다. 이미 언급했듯이, 이 수동적 주의력은 훈련이나 연습으로 인한 것이 아닙니다. 순간 순간, 끊임없이 우리의 생각과 감정의 움직임을 조용히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가 눈을 뜨고있을 때만이 아닙니다. 이 문제를 깊이 추구해 나가면 수면 중에도 자신이 꿈을 꾸기 시작하는 것을 알 수 있으며, 곧 지금까지 꿈에 준 모든 상징적인 의미를 버리게 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크리슈나 무르티의 수동적인 시험은 위퍼 사나와 비슷하지만 약간 다른 점이 있습니다. 위파사나는 자신의 몸의 관찰에서 출발하여 다른 느낌과 의식으로 진행되지만, 수동적인 수험은 자신의 생각을 출발점으로 만드는 것이다. 이 차이는 크리슈나 무르티가 서양인과의 대화를 통해 가르침을 펼쳤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것 같다. 현대의 서양인이 논리적으로 이해하지 못한 것은 잘 받아들일 수 없다는 사실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둘 중 어떤 수행법이 좋을지 묻는다면 위파사나를 채택하고 수동적 수험을 참고하도록 하고 싶다. 정신을 직접 관찰하는 방심하지 않는 수동적 주의력은 보통 사람들에게 기대하기 어려운 정신력이기 때문에 몸을 관찰하는 방법이 누구나 시작하기 쉽고 효과도 확실하기 때문이다.

 

어쨌든, 여기서 소개한 두 가지 수행법 중 하나만이 제대로 실천해도 확실히 연성할 수 있다고 대담하게 할 수 있다. 다른 방법은 없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여기서 소개하지 않은 많은 명상법과 수행법이 있다. 단지 여기서 소개한 두 가지 방법이 내가 만나 실행해 본 중에서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기 때문에 소개한 것이다. 크리슈나 무르티에 관한 자료 중에서도 몇가지 좋은 자료에 스크랩해 두었으므로, 흥미가 있는 분은 참고로 하는 것을 추천합니다. 죽음을 넘어 ㅡ, 죽음이 아니다. 연성한 사람에게는 죽음이 없다. 육체가 진정한 나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나라는 생각 자체가 없기 때문에 죽는 나가 없기 때문이다. 육체가 진정한 나가 아니라는 것으로, 정신이 진정한 나라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정신도 또 나라는 생각뿐이며, 그마저 없어지면 정신도 없어진다. 그것은 어쨌든 규정되어 있지 않고, 그러한 흐름만이 있고, 그 흐름에서는 육체의 죽음도, 그러한 흐름의 한 모습에 지나지 않는다. 부드러운 상태를 "흐름"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상합니까? 흐름은 신라시대 대학자였던 최지원이 난란비서라는 글로 밝힌 한국 전통 종교의 핵심 진리와 관련된 단어다. “우리 나라에 현묘한 길이 있기 때문에 이것을 풍류라고 부른다. 그 다리의 기원은 선사에 자세하게 실려 있다. , 그 풍류의 위대성은 한자 사전을 통해 증명됩니다. 사전에서 바람이 들어가는 단어에는 풍습, 풍채, 풍모, 풍도 등 대부분이 좋은 의미로 사용된 문자이다. 이 문자가 좋은 의미로 사용된 이유는 고대 사회에서 바람이라는 문자가 태양신과 그 사자를 가리키는 문자였다는 사실을 알면 이해할 수 있다.

 

고대에 태양신을 받은 모종교인들을 동이라 부르지만, 중국의 역사에서는 우리의 모레를 동이족으로 기록하고 있다. 동이족에 대한 중국인의 동경은 지금 진행 중인 동북 공정만 봐도 추측할 수 있는 사항이다. 그런 바람의 흐름이 풍류다. 즉 풍류는 단순한 바람이 아니라, 동이족의 흐름이며, 동이족의 가르침의 흐름이므로, 동이족의 진리 자체를 가리키는 이름이 된다. 그러니까 김강경에서는 흐름을 깨달음의 경지를 대신하는 말로 쓰기도 한다. 금강경에는 "수다를 입류라고 부른다"라는 말이 나오고 있지만, 불교로 깨달음의 경지를 인터넷으로 나눈 수다(예류), 사태(一來), 아나함(부도)의 첫 사람 수다를 금강경에서는 입류라고 부르고, 다른 경전에서는 수다가 얻은 깨달음 열매를 예류과라고 한다. 그러므로 깨달음의 또 다른 단어가 흐릅니다. 아마 옛날에 깨달음을 얻는 것이 풍류의 무리가 된다고 생각된 시대가 있었던 것 같다. 따라서 연성 상태를 "흐름"으로 표현하는 것이 상당히 바람직하다. 한국어를 살려 사용해도 좋고, 전통사상부활에도 좋고, 종교통합에도 기여하는 것이다. 아무튼 연성 상태이지만, 그런 흐름 속에서는 천지와 한 덩어리에 흐르는 본래의 성격이 있는 것만으로, 죽은 제한된 「나」는 정신이나 육체에서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연성할 수 없는 사람에게는 어떨까? 연성하지 못한 사람에게는 육체의 죽음이 온다. 그러나 죽은 사람은 죽음을 경험하지 않는다. 단지 고통을 경험할 뿐이다. 아픔이 극한에 이르는 순간, 영혼이 육신을 빠져 나와, 「나라는 생각한다」는 더 이상 육신을 나라고는 생각하지 않고 살아간다. 그러니까 연성하지 않은 사람에게도 죽음은 없다. 죽음은 죽는 당사자가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은 주변 사람들이 경험한다. 그들은 더 이상 살아 있지 않은 육체를 보면서 죽음을 배우고, 몇 명의 죽음을 경험하면서 자신의 죽음을 예상한다. 이렇게 만들어진 죽음의 관념이 죽으면 끝이라는 생각을 만들어내는 것만으로 실제로 사람에게 죽음으로 불려도 좋은 종결은 일어나지 않는다.

 

부드러운 사람에게도 연성에 실패한 사람에게도 죽음이 없다는 사실이므로, 죽은 다음 세계는 당신이 지금까지 생각해 온 것과는 전혀 다르다는 사실을 먼저 인식하십시오. 지금까지 여러 종교에서 말해 온 사후 세계는 당신이 죽고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살고 경험하는 것을 가르쳤습니다. 지금의 느낌 그대로, 지금의 감정 그대로 체험해야 하는 것이므로, 아는 사람이 보려면 죽어 경험하는 것보다 비참할 수 없는 그 장래를 알리는 것이 정말로 당신을 위한 길이다. ㅡ, 쉬고 가는 법 스스로를 벗어날 수 있을 때까지 사람은 인과응보의 철칙에 묶여 쫓기면서 살아간다. 그런 인간의 비참한 현실을 석가는 바로 적절한 비유를 듣고 깨어 준다. 새벽 가을이 깊게 가던 어느 날, 차가운 바람이 불면서 나그네가 서둘러 집에 갔다. 문득 다리 아래를 구부려 보면 하얀 것이 많이 쌓여 있었다. 자세히 보면, 그것은 사람의 뼈였습니다. "왜 이런 곳에 사람의 뼈가 있는 것인가?" 그렇게 조금 가지 않았지만, 전부터 큰 호랑이 한 마리가 시끄럽게 다가왔다. 나그네는 매우 놀랐다. 그래! 이 뼈는 그 호랑이가 먹은 사람들의 것이구나라는 생각이 미치자 바로 다리를 돌아온 길을 되돌아보고 도망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길이 잘 들리지 않았는지 가운데 도망쳐가자 절벽에 부딪히게 되었다. 절벽 아래에는 거친 폭풍이있는 바다가 있었고 뒤에는 호랑이가있었습니다. 진퇴양란에 빠진 나그네는 절벽의 가장자리에 있는 이치혼마츠로 뛰어올랐다. 호랑이도 발톱을 세워 소나무를 향해 달려갔다. 이대로 끝인가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나그네는 마지막 나머지 힘을 다해 옆에 있는 나무의 넉클을 타고 아래로 내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나무의 넝마는 도중에 부러졌고, 나그네는 허공에 배달된 형태가 되어 버렸다. 위에서는 호랑이 침을 흘려 노려보고 있었다. 또 아래에서는 집어넣는 듯한 격렬한 물결이 일어나 바다에는 빨강, 검정, 청색의 3마리 용이 곧바로 떨어질 것 같은 나그네를 받아 먹으려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서 정말 난 여유가 없을 정도로 인생이 무거워지면 그 짐을 내려 쉬고 길을 떠나게 된다. 죽음을 통해서 진실한 나는, 가짜 나가 살아 있는 동안, 교제한 사랑의 대차 대조표를 검토하고 사랑의 빚을 돌려보낼 수 있는 다음 인생을 디자인하여 다시 태어난다. 자연은 사랑이므로 사랑을 베푼 사람은 자연으로 가득한 행복을 누리지만, 사랑을 쌓아놓을 뿐인지 빼앗아 숨겨놓은 사람은 그것을 남김없이 내놓을 때까지 고통받게 된다. 다른 누가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자신이 자발적으로 그렇게 하는 것이다. 석가가 수백번의 전세 이야기를 들어주고 자비와 보쉬를 가르친 것도 그런 사실을 관철해 보았기 때문입니다. 나의 기쁨을 위해 다른 사람의 생명을 빼앗기면, 그의 기쁨을 위해 내 생명을 주어야 하고, 나의 기쁨을 위해 타인에게 슬픔을 주면, 나의 눈물로 갚아야 한다. 그것이 제가 천지를 창조할 때 스스로 결정한 내 자연법입니다. 수행자의 생활이 자학에 가까운 이유가 여기 있다. 진정한 나는 누구에게 배우지 않아도 그 사실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거짓의 나에게는 자신보다 좋은 사람들이 맛보는 즐거움이 부럽게 보이지만, 정말로 나에게는 자신보다 나쁜 사람들이 경험하는 통증을 견딜 수 없는 슬픔으로 느껴진다. 선과 악은 여기로 나뉜다. 그러니까 죽음과 사후 심판을 두려워하지 않고 타인을 아프면서도 아픔을 느끼지 않는 자신을 두려워해야 한다. 타인을 아프면서 자신도 그만큼 병이 되면 빚이 생기는 일이 없다. 타인을 아프면서 그 아픔을 내 고통으로 느끼면서까지 다른 사람을 아프게 하는 바보는 없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고통받는 고통은 고통으로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부모님은 사랑의 매를 들고 인류의 스승은 인류의 고난과 죄를 구속한다. 그러한 희생과 헌신을 모든 사람에게 베풀 수 있다면, 죽음은 더 이상 공포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ㅡ, 연가오 신통

 

사람이 죽으면 어떻게 되나요? 과학이 발달해도 인간 정신의 비밀은 과학의 연구 대상에서 제외되고 있으며, 과학이 밝혀지지 않은 사후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 세계로 여겨지는 것이 일반인의 상식이다. 이것이 과학의 위험입니다. 과학자들이 밝히지 않으면 아무리 중요한 것도 아니다. 국가 원수의 스캔들들은 찢어지는 미디어의 힘도 과학이 무시하는 진실까지 분명히 드러내지 못하는 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어두운 세계다. 우리 인간에게 죽음이 차지하는 비중을 생각할 때, 결코 가볍게 다루어서는 안 되는 임사체험과 같은 것은 뉴스 거리에도 안 된다. 멸망을 향해 달리는 인류사회는 그 흐름을 방해하는 어떤 진실도 은폐하는데 급급하다. 이러한 세태를 조장하는 세력은 멸망 프로그램을 집행하는 사람들만이 아니다. 현대사회의 수익자인 기득권자들에게도 사후 세계의 비밀이 드러나는 것은 서투른 일이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의 반정부 시위가 두려워하지 않는 정치인은 없을 것이다. 과학자 집단의 태반을 차지하는 의료 종사자에게는 사후 세계의 존재는 막대한 경제적 손실을 초래할 것입니다. 그 후 사후의 세계는 과학의 권위에 의해 인간의 세계로부터 추방되었다. 천동설이나 달의 나라의 토끼와 같이, 미개시대의 유치한 상상으로서 다루어져, 더 이상 일상생활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그러나 죽음을 극복한 수많은 수행자들은 하나처럼 육체의 죽음 후에도 중단되지 않는 정신활동을 말하고 있으며, 그 정신활동은 많은 기록에서 전해지는 임사체험자가 전한 사후세계와 일맥상통한다. 그런 내용을 여기에서 중언부 말하는 것은 시간의 낭비에 불과하다. 어쨌든 이 글을 읽는다 당신이 늦어도 백년 이내에 확인하는 사실을 두고 먹고 싶지 않은 음식의 영양분 선전하도록 다양한 자료를 긁어 모아 논의하는 것도 피곤한 것이다. 태어나 죽는 고통을 극복하겠다는 염원을 안고 수행을 시작하고 끝을 본 석가의 제자답게 죽음을 갈아입는 일만큼 생각하는 불교 선사들은 사후 세계에 대해서도 뛰어난 가이드를 남겨두었다. 티베트 라이온의 책은 그 중에서도 백미에 들 수 있지만, 그 책을 읽는 것만으로도 생사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이 기간이 보통 5일 반이며, 다음 4일 반 동안 영가는 다시 몬론의 무의식 상태에서 다음에 받는 삶의 몸을 느끼고, 그 후부터 21일간 다음으로 선택된 인생을 상징하는 빛과 환상을 만나 쫓는다고 한다. 그 과정에서 동굴이나 집, 구멍 등의 피난소를 만나 숨으면 그곳이 다음 생 어머니의 자궁이거나 삼악도의 입구라고 한다. 이 기간 동안 영가가 받는 정신적 고통을 사자의 책은 실감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지금 너는 육체가 없는 마음으로 존재하고 있다. 따라서 어디에도 머물 수 없습니다. 추위를 느끼거나 화를 낼 것입니다. 당신의 마음은 안정된 상태를 유지할 수 없으며 끊임없는 혼란을 경험할 것입니다. 지금 나는 죽었다. 그래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라는 생각에 마음이 떨어질 것이다. 당신은 언제 끝날 수있는 심한 고통 속에서 좌절감을 느낄 것입니다. 하지만 이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어디에도 머물 수 없다. 그러므로 어떤 느낌이나 사고를 잡고 괴롭히지 마십시오. 그런 일은 모두 지나가는 것이다. 마음을 편안하게하십시오. 앞으로는 제트기에 놓인 음식을 제외하고는 다른 음식이 주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신뢰할 수 있는 확실한 친구도 없다. 이런 상태는 당신이 정신적인 몸을 가지고 탄생 중간계를 방황하고 있다는 증거다. 당신이 지금 경험하고 있는 기쁨과 고통은 당신이 쌓은 진화의 추진력[카르마]에 의해 나타난다. 당신이 살았던 이웃과 집, 친구와 가족을 볼 수 있습니다. 게다가 당신 자신의 시체까지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때 너는 정말 내가 죽었어. 그렇다면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라고 생각해 극단적인 절망감을 느낄 것이다. 그래서 당신은 새로운 육체를 가지고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라는 생각에, 당신이 날아다니는 새로운 육체를 찾아 여기 거기에 헤매게 될 것이다. 하지만 당신의 시체 속에도 다시 들어가려고 노력할 것이다. 그러나 너가 저승 중간계를 지나고 있는 동안, 겨울이라면 시체가 얼어버렸을 것이고, 여름이라면 부패했을 것이다. 아니면 당신의 가족이 묻히거나 화장을 했을 수도 있고 새와 짐승의 먹이가 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당신은 당신의 몸 안으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9 번까지 그것을 반복합니다.

 

네가 조심했을 때 강아지로 태어난 너의 모습을 보게 될지도 모른다. 이전까지는 사람이었지만 지금은 개로 태어나 개집에 묶여 괴로워하게 되는 것이다. 돼지 우리, 개미 굴, 벌레 구멍, 소와 양과 염소와 같은 가축의 외양 사이에서 태어날 수 있습니다. 그런 곳에 태어나면 인간의 상태로 돌아오지 않는다. 심하게 우울하고 성가신 상태에서 다양한 비참한 통증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지옥계나 악마계 등을 떠올리며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할 것이다. 이것보다 끔찍한 일은 없습니다. 아! 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끔찍한 일이다. 거룩한 영적 스승의 가르침을 받지 않으면 윤회의 깊은 구덩이에 빠져 헤어지지 않는다. 가장 주의해야 할 것은 지옥에 떨어지지 않도록 화내지 않는 것이다. 중음층의 영가들은 살 때 죄를 범해도 구원받을 가능성도 열려 있지만, 지은 죄가 없어도 지옥에 가는 길도 열려 있다. 그런 위험을 사자 책은 이렇게 경고한다. 그때 당신은 세상에 남아 있는 가족들이 당신의 명복을 자주 받고 동물을 붙잡고 죽음의 신에게 제사를 드리는 불쾌한 광경을 보게 될 것입니다. 이 환상은 당신을 너무 화나게 할 것입니다. 이런 불쾌한 환상에 사로잡혀 화내면 지옥계에 태어난다. 그러므로 살아있는 사람들이 무엇을 하더라도 화내지 마십시오. 사랑하는 마음만을 품으십시오. 너는 재물과 소유에 대한 고집을 뿌리지 못하고, 다른 사람이 당신이 남겨 둔 재물과 소유물을 차지하고 쓰는 것을 보고 화낼지도 몰라요. 너가 아무리 높은 차원으로 태어나는 상태에 도달했다고 해도, 그러한 감정에 사로잡히면, 지옥계나 귀계에 태어나게 된다. 아무리 애착을 가진다 해도, 당신에게는 세상에 남겨 온 것을 가지는 힘이 없다. 또 너에게는 아무 역할도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당신이 떠나는 모든 재산에 대한 고집 리시오. 확실히 완전히 포기하십시오. 당신의 물건을 누가 쓰고 있는지 걱정하지 마십시오. 당신은 모든 소유물을 영적인 스승과 세 보물 앞에 바쳤다는 생각으로 집착에서 해방된 평안한 상태에 머물도록 한다.

 

사자의 책은 죽은 사람을 위한 천도재에 쓰는 법문이 아니다. 그렇다면 다른 성전처럼 널리 배포하고 상가에서 49재를 보낼 때 필수 성전으로 독경한 것이다. 그런데 사자의 책은 티베트에서도 비전되어 왔고, 최근에는 세계에 알려져 있었다. 그 이유는 사자의 책이 살아 있는 동안 죽음을 체험하고 수행을 완성하고 나카네와 미타케섬에서 괴로워하는 영가들을 구제하기 위한 가이드서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소개한 책 앞 부분에는 이러한 사정이 그대로 기록되어 있다. <티베트 사자의 책>은 8, 9세기 무렵에 위대한 스승 파드마 삼바바가 인도와 티베트 불교도를 위해 쓴 책이다. 파드마 삼바바는 후세대를 위해 그 책을 숨겨두었지만, 14세기에 이르기까지 유명한 비장문헌 발굴자인 카르마 림프에 의해 발견되었다. 물질 세계의 정복을 목표로 하는 서구 문명의 마지막 미개척지는 우주 공간이다. 따라서 서양에서는 미지의 우주공간을 여행하는 우주비행사가 영웅의 환대를 받는다. 그러나 티베트인들은 내부 우주에 관심이 있습니다. 그들은 죽음과 중간계 그리고 환희가 넘치는 무아의 세계를 향해 여행을 떠난다. 그래서 그들은 의식을 가진 채 죽음이라는 해체 과정을 통과하는 능력, 마음을 육체로부터 분리하고 마음으로 신비한 몸을 만드는 능력, 그리고 그 몸으로 인간의 의식이라는 다른 우주를 여행하는 방법을 습득하게 되었다. 티베트에서는 이런 능력을 갖춘 정신세계비행사가 영웅이다. 달라이 라마와 수천을 헤아리는 다시 태어난 라마(이들은 툰국이지만 부다의 화신이라는 의미다)은 모두 티벳 영웅들이다. 사람들은 그들이 죽음과 중계와 환생 과정을 습득했다고 믿습니다. 사자의 책이 수행 지침서임에도 불구하고 깊게 숨겨진 이유는 티베트의 불교 탄압에서도 찾을 수 있겠지만, 아무도 시도할 수 없는 수행이 사후 세계의 체험 수행이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죽음의 순간을 맑은 정신에 통과시킬 수 없다면, 그래도 불국토에 들어갈 수 있고, 그렇지 않으면 중음계에서 업보가 만들어내는 환상에 시달리고 있지만, 축생이나 지옥에 들어갈 위험이 크다.

 

나라는 생각이 만들어지는 순간부터 사람은 사람이 된다. 나라는 생각이 없을 때에는 사람은 사람이 아니라 신, 즉 자연의 일부이다. 그리고 스스로를 나라고 생각하고 자연과 분리시키는 순간에 신성(자연성)이 상실된다. 이 분리 과정은 보통 어머니의 가슴에서 일어난다. 그러므로 세상의 모든 어머니는 그들의 자녀들에게 하나님과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 바닥에는 신성을 품고 있던 나의 완전함에 대한 그리움도 섞여 있다. 그러므로 다양한 종교에서 신성으로의 복귀를 담당하는 역할은 모성을 가진 하나님이 담당한다. 기독교 성모 마리아와 불교 관세음 보살 등이 대표적인 경우다. 대부분의 인간에게 천국은 어머니의 물건이고 어머니는 천국의 왕이다. 어쨌든 이때까지는 그래도 행복한 시기다. 내가 사는 곳이 천국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의 일체성은 잃어버렸지만, 내가 아닌 모든 것은 자연이며, 그 자연은 하나님의 영토이다. 공중을 날아다니는 새처럼 백합처럼 살 수 있는 천국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영토에서 어린 아이처럼 살아갈 때입니다. 그러나 그 행복은 보통 짧게 끝난다. 나라는 사고는 일어나는 순간부터 타인이라는 생각을 수반한다. 나와 구별되는 다른 사람이 없으면, 국가는 생각은 굳이 필요 없다. 타인을 가리키는 남자와 출생을 가리키는 남자가 같은 문자로 사용되는 것도 우연뿐이 아니다. 내가 있고 다른 사람이 있다면 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과 구별되는 나의 것이 태어나고 자연은 완전하게 나의 손을 떠난다. 내 것이 아니라 나머지는 모두 다른 사람의 것입니다. 부모님이든, 형제이든, 하나님이든, 미래의 문제이며 한 번 내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인간이 나의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은 얼마입니까? 세상은 알수록 넓어지고 저는 작고 초라한 것입니다. 그래서 갈수록 욕심이 커지고 끝없이 나를 쌓아 가지만 그만큼 내가 가지고 있지 않은 부분이 더 크게 느껴진다. 진정한 나에게는 우주 전체가 나의 것인데, 나라는 사고는 먼지보다 작은 지구상에서 수천억분의 일도 할 수 없는 부분만을 낼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문제가 생기지 않을 수 없다. 아무리 많이 가지고도 욕심을 채울 수 없는 것이 인간의 본래의 운명인 것이다.

 

그 하늘 자리에 마음 속으로 가득한 세월의 파편인 기억 속에서 작고 가벼운 것이 먼저 떠오른다. 보통은 즐거운 기억이다. 세속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의 유혹은 이때부터 시작된다. 그것을 단지 바라보고 무시할 정도로 버려지면 마음에는 그만큼 여유가 커지고 좀 더 크고 무거운 기억이 나타난다. 보통은 괴롭고 슬픈 기억이다. 진리로 이끌려고 하는 정말 내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들을 무심코 바라볼 수 있으면 그 기억도 버려져 그만큼 마음이 깨끗해진다. 그렇다면 지금 나에게 오는 것을 어떻게 버릴 수 있을까? 사실 수행자가 가장 먼저 부딪히는 곤경이 버리고 싶어도 버릴 수 없는 상황이다. 버리고 싶은 것처럼 모두 버릴 수 있다면 어른이 될 수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나에게 오는 것을 버리는 가장 편리한 방법은 지금 떠오르는 생각을 신앙 대상에게 바치는 것입니다. 보이고, 듣고, 느껴지고, 떠올리는 모든 것을 아는 그 순간, 신앙대상의 명호를 부르는 것에 의해 신앙대상에게 주어 버리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자신의 생각이 그만큼 자연스럽게 되돌아가기 때문에 마음의 여유가 퍼지게 되고, 이런 자세가 습관화되면 이번에 태어난 시간의 잔해인 기억이 서서히 소멸해, 수행이 깊어지면 언젠가는 과거생에게 쌓아 놓은 숙업마저도 불다. ㅡ, 수행자의 살림살 인생은 공수의 가라테라고 한다. 맨손으로 와서 맨손으로 떠나는 것이 인생이라는 말이다. 굳이 진리를 찾아 헤매는 수행자가 아니더라도 사람이 죽는 모습을 보고 이 진실을 부정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살아 생전에 어떤 부귀영화를 맛본 사람도 죽어 가져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 이것이야말로 인생에 적용되는 질량 불변의 법칙일지도 모른다. 인생이 그런 것이라면, 아마도 가장 자연스러운 삶은 무소유 인생 일 것입니다. 그런 인생을 사는 것이 매우 어렵고 아무도 실천하는 것은 어렵지만, 가라테로 가는 것이 인생인 이상, 빈손으로 살아가는 것이 가장 자연법칙에 충실한 인생이 아닐까?

 

그러므로 수행자들은 무소유의 삶을 추구한다. 수행을 시작하면서 가지고 있는 것을 모두 버리고 출가를 하고, 죽는 날까지 마음속의 짐을 내려 공부하는 사람들이 수행인들이다. 그러한 수행 과정에서 올바른 수행자들은 자신을 살리고 타인을 살리는 살림살리를 해 나가게 된다. 자신의 몫에서 주어지는 것 중에서 수행에 필요한 최소한의 것만을 가지고 나머지는 타인에게 베풀어준다. 수행으로 얻은 인생의 지혜와 정신적인 능력으로 고통받은 생명을 구함으로써 타인을 살려 인생의 의미를 찾는 것이 수행인의 살림살이다. 보통 사람들이 보려면 어리석음까지 한 희생적이고 헌신적인 인생이겠지만, 수행자 자신에게는 그것이 올바른 인생이다. 수행을 완성한 스승들로부터 내가 없어지면 전 세계가 나가 된다고 배운 사람들에게는 모든 생명이 나의 일부이기 때문에 타인을 살리는 것이 실제로 나를 살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살림살이 그 중에서도 최상의 살림살이를 불교에서는 무슈상보시(모습에 얽매이지 않는 베품)이라고 한다. 나나남이라는 생각도 없기 때문에 타인을 살린다는 생각조차 초월해버린 살림살이 베풀었다는 생각조차 없기 때문에 보상조차 생각하지 않는 완전한 베품이 무주상시다. 그런데 수행자들은 본래 가지고 있는 것이 별로 없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생각에 붙이지 않고 베풀려고 해도 베풀는 것만이 별로 없다. 베풀어질 정도로 가지고 있으면 오히려 문제가 있는 수행자들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물질적인 면에서 그렇고, 수행자들에게는 아무리 베풀어도 줄어들지 않고, 더욱 많아지는 보물이 있기 때문에, 그것이 진실이다. 이 진리를 베푸는 것이 법보시이며, 생각에 묶이지 않고 진리를 베푸는 무주상법보야말로 수행인의 최초의 덕목이자 의무이기도 하다. 초보자들은 성전에 쓰여진 말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로하거나 진리로 목마른 사람들을 수행의 길로 인도함으로써 법의 견해를 실천하게 된다. 그런 살림살이를 하지 않고 수행만 하는 사람보다 부족한 것처럼 자신이 할 수 있는 법견을 하는 사람의 수행이 훨씬 빠른 것이 보통이다.

 

신앙대상은 나 자신이 선택한 우주의 전체상이며, 내가 마지막으로 돌아가서 하나해야 할 대상이거나 내가 마지막이 되고 싶은 인격의 표상이다. 그리스도인에게는 하나님, 불교에는 부처, 도교에는 자연, 유교에는 하늘이 될 것입니다. 대상이 누가 된지에 관계없이 자신의 마음 속에 언제나 신앙대상을 모시고, 나로부터 일어나는 모든 생각과 느낌을 깨닫고, 그 순간에 신앙대상을 부르면 된다. 믿음이 없는 사람이라면? 그런 경우에는 일심선원으로 부르는 주인공을 찾아야 할 것이다. 일심선원에서는 대행승의 가르침에 따라 모든 생각을 주인공으로 되돌리는 공부를 한다. 내가 우주와 나 자신의 주인인데 그 주인이라는 것이 실체가 없는 하늘이라는 것이다. 좋은 것도 나쁜 것도 모두 주인공이 세운 것이기 때문에 돌아가면 맡겨버리면 번뇌가 사라져 본성을 회복한다는 가르침이다. 이처럼 내 생각을 신앙대상에 바치면서 수행해 보면 내 마음이 비워질수록 신앙대상도 보다 완전해진다. 권선징악의 심판자로부터 자비로운 인도주의자로 성장했지만, 관념을 초월한 나 속의 절대 존재에 완성된다. 이러한 현상은 신앙대상이 어떤 존재인지에 관계없이 일어난다. 신앙이 절실하고 수행이 옳다면 어떤 신앙이라도 인간과 우주의 공동완성에 귀결한다. 다시 말하지만, 세계가 불완전한 이유는 나 자신이 불완전했기 때문이다. 나 자신이 불완전한 이유가 저 안쪽에 있는 불완전한 아이디어를 위해 이기 때문에, 저 부족한 아이디어를 전부 비우거든 나 자신이 자연적으로 완전하게 된다. 그때 내 안에 묻혀 있던 본래 완전한 진리의 빛이 나타난다. 그러므로 시봉부강에서 신앙대상은 신앙의 기둥 역할만을 주어도 충분합니다. 봉투 실행의 또 다른 좋은 점은 내가 만나는 모든 것을 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을 보고 그 사람의 이름이 떠오르기 전에 신앙 대상을 먼저 부른다. 이렇게 여러 번 반복하면 그 사람에게 신앙대상의 축복이 내려진다. 나에게는 그 사람이 신앙 대상으로 보이기 때문에, 나의 우주 안에서는 그에게 더 이상 불완전함이 없어진다.

 

이와 같이 시봉 수행을 통해 일절 만물을 진리의 상태로 되돌리는 것,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구원입니다. 연성 도우미 ㅡ, 결코 쉽지 않은 방법 진리의 완성은 사람이 반드시 가야 하는 길이며, 다시 말하면 사람다운 사람이 가는 길이다. 크게 보면 살아있는 것 자체가 진리의 한 모습이므로, 별로 진리를 찾아보면 수리를 하는 일도 없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살아 있는 동안 자신이 우주의 중심에 서는 대자연의 주인이라는 사실을 모른다. 큰 죄를 짓지 않고 살고 죽은 사람이라면 죽은 뒤 잠시 그런 진실을 각성하기도 하지만, 곧바로 각자의 인연에 따라 윤회의 바퀴에 휘말려 돌아오기 시작하면 그러한 진리는 되돌아볼 틈도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소수의 사람다운 사람들이 자신의 한계를 슬픔하면서 그 한계에서 벗어나기 위해 진리를 구하려고 노력하고, 그 중 극히 소수의 사람들이 자신의 내면에 자고 있는 본래의 성격을 발견하고, 본래의 자연성을 회복한다. 그런 이들을 진정한 사람이라고 해서 진인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따라서 자신을 포유류에서 진화한 영장류의 일종으로 생각하는 사회적 동물, 경제적 동물, 논리적 동물들은 걷기 어려운 길이 연성의 길이이기도 하다. 인간이 소우주라는 무언을 당연히 받아들이는 사람, 이웃이 나 자신의 일부라는 사실을 듣는 순간 이해하는 사람, 사람이 하나님의 분신이라는 말을 따르지 않고 공감이 되는 사람, 사람이 본래 완전하다는 말에 자연스럽게 가슴이 달리는 사람..... 그런 사람들만이 걸을 수 있는 길의 연성의 길이다. 그래서 연성의 길을 안내하는 선배들을 만나는 것은 정말 어렵다. 세상에 많은 수행자가 있고, 완성된 수행자들의 가르침을 배우고 전하는 사람들은 많지만, 그들이 전하는 진리는 스스로도 체험할 수 없었던 죽은 진리가 대부분이다. 이런 상황이라 연성의 길에 들어간 사람들, 진리가 있다고 믿고, 그 진리를 확인할 때까지 멈추지 않고 나아가는 사람들은 진정으로 드문 사람들이다. 그들이 그 길에 들어간 것만으로도 힘든 일인데, 그 길을 걸어가는 어려움이다.

 

스승인 것 같은 사람이 드문 세계다. 진리를 찾아 실천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이 요구한 진리를 이용하여 세속적인 욕망을 채우려는 종교인이 가득한 세계에서 수행의 길을 제대로 걷는 사람들은 이용만 되고 배척되는 경우가 많다. Bang Bang Down Bang Bang도 찾기가 어렵습니다. 한때 진리에 의지를 두었다고 해도 세속의 유혹에 빠지거나 스스로의 한계를 극복할 수 없고, 진리를 무시한 사람들은 그 길을 걷지 못한 사람보다 더 심한 방해자가 되어 버린다. 일반인이어야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예전에는 몰라도 수행자를 존경하던 세속인들이 최근에는 과학지식으로 무장해, 수행자들을 정신병자 취급을 한다. 오늘날의 실행자는 이러한 악조건 하에서 실행해야 합니다. 그러면 수행의 길에 들어가는 사람들도 자연스럽게 23종류의 클래스로 한정된다. 그 중 하나는 출생의 성격이 연예인의 것입니다. 이런 경우에는 어릴 적부터 기묘한 아이로 공인되어 성장하면서 반사회적이거나 성격이상자라는 낙인이 밀려 사회에서 배척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런 상태에서도 범죄자가 되지 않는 순수한 성격을 가진 사람들이 수행자가 된다. 또 다른 경우는 본의가 아니라 극한 상황에 부딪히게 되는 사람들이다. 어린 나이로 죽는 병이 될 경우 갑작스런 사고로 절반 죽어 일어났을 경우 근처 사람들의 무의식 죽음으로 큰 충격을 받았을 때 번영했던 사업이 하룻밤 동안 도산하여 인생의 허무를 절약하는 경우 등이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의 지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고난을 경험하면서 자신의 한계를 깨닫고 그것을 극복하는 방법을 찾아 진리를 탐구하게 된다. 마지막 것은 주위 사람들의 초대를 따를 경우이다. 한 종교인과의 대화 도중에 영감을 받거나, 널리 알려진 수행자의 가르침을 듣고 마음이 인도되거나, 우연히 만난 수행자의 능력에 감화되어 진리에 의지를 놓기도 한다. 이런 경우에는 그 계기가 된 사람에 대한 신앙이 깨어나면 수행의 열정도 망가지는 것이 보통이다. 어쨌든 지금의 세계는 ㅡ 아마 옛날에도 같았을 텐데 ㅡ 수행에 의도하기도 어렵기 때문에, 중단하지 않고 수행을 계속하는 것은 더욱 어렵다.

 

천만 다행히 인종의 멸종은 견딜 수 있을지 모르지만, 지나간 어떤 말세보다 비참할 수 없는 재해가 이미 시작되고 있다고 봐야 할 것 같다. 100여년 전 현대의 이런 상황을 예언한 김일부, 최재우, 강일승과 같은 손현 등은 이 시대를 천지개벽시대, 천지성공시대라고 표현했다. 지금은 천지의 가을에 해당할 때이며 지난 5만년 세월 사이에 자란 인류 문화가 열매를 맺는 시기라는 의미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천국으로 들어올리고 믿지 않는 사람은 지옥의 황화에 던져진다는 예언이다. 어쩌면 인류가 멸망할지도 모르는 이 위기한 시대에 느긋한 수행이나 하라는 이유도 이런 희망적인 시점이 있기 때문이다. 천지개벽으로 표현되는 대파국의 시대가 사실은 사람다운 사람을 수확하는 과정이라면 지금 사람에게 가장 가파른 것은 사람다운 사람이 되기 위한 수행이기 때문이다. 설언 종말이 오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도 가장 가파른 것이 수행이라는 점은 마찬가지다. 인류의 종말은 올 것인지 모르겠지만, 개인의 종말인 죽음은 언제 어디서나 매일 습격하고 있다. 죽은 후에 오는 고통을 최소한으로 줄이는 것이 수행이므로 누구에게나 가장 중요하고 가파른 일은 수행 밖에 없다. ㅡ, 어려운 길을 편하게 연성의 길은 어렵다. 인생사 중 하나라도 험난이 아닌 것은 없겠지만, 그 중에서도 최대의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 수행이기 때문에, 다가가기 전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고난이 연속되는 것이 연성의 길이다. 죽으면 맹인이 “하늘이 있는 사람에게 큰 일을 맡기려고 하면, 우선 그 마음을 고생시키고, 뼈와 힘줄을 괴롭히고 굶주려, 하는 일마다 현기증을 하고 참을성있게 기른다”고 말했을까. 하늘이 사람의 운명을 주관한다고 생각한 유교를 닮은 세계관을 가진 기독교에서도 하나님이 사람다운 사람을 시험하는 광경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그것이 욥의 시련이다.

 

하나님의 충실한 노예였던 욥에게 사람이 괴롭히기 어려운 다양한 고난이 주어졌으며, 욥이 그 시련을 모두 이기기 때문에 큰 축복을 받게 되었다는 일화다. 이것도 수행의 어려움을 가르친 모범의 하나이다. 따라서 직원은 실행 중에 장애가 발생하거나 고난이 발생하더라도 이를 피하거나 중단하지 않아야 합니다. 수행 중인 장애는 저주가 아니라 시련에 불과하며, 백회 양보해도 전생에게 스스로가 빚진 빚을 갚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장애를 전부 앉아 여유를 얻으려는 수행을 제대로 할 수 없다. 시도할 때도 없이 사고가 일어나 원인도 모르는 질병이 떠나지 않는 상태에서 수행을 계속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는 수행자가 아니라 연성인 성인이라고 부르지 않으면 옳을 것이다. 따라서 수행에 장애가 오거나 이유가 없는 고난이 다가온 경우 그 원인을 정하여 능동적으로 그 원인을 해소하는 것이 옳다. 장애와 고난의 원인은 크게 3가지로 나뉜다. 그 첫 번째는 스스로의 직장이다. 자신이 전생과 현생에 세운 허물이 장애가 되어 나타나는 것이다. 두 번째는 조상의 시부야다. 조상 가운데 죄를 많이 지어 축생이나 지옥 등 악도에 빠진 편이 있거나 죽어도 애착이나 원한을 버리지 못하고 중음계에 머무르는 편이 있으면 그 자손에게 다양한 장애를 일으키게 된다. 셋째는 사회적인 공업이다. 수행자가 자신의 한계를 벗어나 이웃을 내 몸으로 받아들이면 가장 먼저 무주고혼들이 달려 구원을 사랑한다. 수행자가 만나는 사람들의 조상 가운데 천도해야 하는 영혼들의 구이가 그 뒤를 잇는다. 이 중 사회적인 공업은 개인적인 수행이 끝난 연성 단계에서 다가오는 장애이므로 장애가 되지만 장애가 아니라 민중교화에 해당한다. 교화의 과정도 넓은 의미에서는 수행의 한 과정이지만, 그 이전의 장애와는 다른 점이 많기 때문에, 수행중의 장애에서는 제외하는 것이 좋은 것 같다. 따라서, 여기서는 개인의 업장과 조상의 질곡을 푸는 방법만을 설명하기로 하자. 1, 조상 천도를 위한 기도 수행에 의를 가진 사람이 먼저 생각해 두어야 할 과제가 선조천도다.

 

환생에 특별한 서원을 세워 수행자의 성격으로 태어난 극히 소수의 사람이 아니면, 자발적으로 수행의 길에 들어가기가 어렵다. 일반적으로는 정신적으로 큰 충격을 받거나 육체적으로 여유가 없는 질병을 경험하면서 인생을 되돌아보며 수행에 의지를 둔다. 그런데 세속을 짊어지고 수행을 선택할 정도로 심각한 실패나 좌절을 초래하는 사건 뒤에는 조상의 영혼이 영향을 미치는 경우가 많다. 조상 가운데 누군가가 살인, 강도, 난법난도 등의 큰 죄를 저지르고 지옥에 빠진 경우나 탐욕이 지나 축생의 몸을 했을 경우 그 영혼은 자손들에게 자신을 구해주는 것을 호소해 버린다. 후손들은 선조들에게 생명을 받은 은혜를 입었기 때문에 선조들의 빚을 분담하는 것이 자연법칙이다. 적선지가에게 필유여경하고, 아카다케 지가에게 필유여언이라는 말은 고리타 분장한 경구가 아니라 진리의 일부를 드러낸 말이다. 선조가 축생이나 지옥 등의 악도에 빠지면 그 자손은 선조가 죄의 값을 모두 지불할 때까지 물질적, 육체적, 정신적으로 고통받게 된다. 원인 불명의 병을 자주 앓고, 악몽을 일으키거나, 불안, 우울한, 급급증 등의 정신 질환을 앓거나, 불의의 재난으로 재산을 잃거나, 사업이 실패하거나 한다. 또 영혼 속에는 깊은 원한과 불쌍한 사랑에 사로잡혀 윤회의 과정을 내디디지 못하고 이승과 저승의 경계인 중음층에 머무르는 영혼도 있다. 이런 영혼을 영가라고 하지만 조상 속에 영가가 있으면 악도에 떨어진 조상이 있는 경우보다 직접적으로 자손에게 나쁜 영향을 미치게 된다. 축생이나 지옥은 중음층을 거친 영혼이 정상적인 윤회절차를 밟아가는 곳이므로 자손에 대한 영향도 간접적이다. 그런데 영가들은 죽은 다음 49일이면 탈출하게 되어 있는 중음층에 밀린 영혼들로, 그들은 영혼의 법률을 따르지 않았던 범법자에 해당한다. 그런 환상에 대해서는 티베트 사자의 책이라는 책에서 자세하게 묘사되고 있다고 환상에 괴로워하는 영가들은 생전에 집착하고 있던 대상에 의지하여 환상에서 도피하려고 한다. 그 집착의 대상이 죽은 뒤에도 저승에 넘길 수 없었던 영가들은 자손에게 의지하려고 하는 것이다.

 

이처럼 영가가 자손에게 의지하려고 하면 가벼운 경우에도 원인 머리를 병에 걸리거나 크고 작은 사고를 당하게 되고 심한 경우에는 영가가 자손의 몸에 들어가 기생하는 빙결 상태로 가게 된다. 이런 사정을 이해하면 세상의 고기가 약하다고 해서 순진하게 수행의 길에 들어가는 것이 올바른 선택이 아님을 알 것이다. 게다가 조상에게 문제가 있는 경우에는 수행의 길에 들어간 자손에게 다른 후손들보다 먼저 영가들이 달려와 소소를 하게 되므로 수행도 제대로 할 수 없게 된다. 그래도 어려운 일이 수행되는데 영혼의 장애까지 겹치면 여유가 어렵다. 그러므로 수행을 의도한 사람은 먼저 조상의 천도에 힘을 넣어야 합니다. 선조천도를 하려고 할 때는 지도법사를 잘 만나야 한다. 어느 조상이 어느 업보에 시달리거나 중음계에 머물고 있는지 알 수 없으면 제대로 천도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죽음의 경계를 넘어 영혼의 실상을 보고, 더욱 그들을 천도시키는 능력을 가진 지도법사를 만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리고 조상의 천도는 천도시키려는 자손의 진심이 가장 중요한 요키이므로 수행에 의도할 정도로 절박한 사람이라면 먼저 수행하여 천도기도를 바치는 것이 좋다고 생각된다. 천도기도를 할 때에는 우선 사정에 따라 정성껏 공물을 마련하고 기도입재를 하는데 신앙대상을 모신 상단과 선조신을 위한 하단으로 나누어 두 개의 상을 둔다. 자신이 믿는 종교가 있다면 그 종교의 제례법을 따르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입재기도를 할 때는 신앙대상에게 선조의 죄업을 소멸시켜 주도록 기도하고, 조상들은 신앙대상의 인도를 따라 진리의 세계로 들어가도록 기도한다. 그 후 일정기간을 정하여 날짜를 빠뜨리지 않고 예정한 대로 기도한다. 기도의 방법은 하루 하루 시간 이상 경전을 읽거나 제대로 앉아 신앙대상 명호를 불러 기도하는 것이 좋다. 기간은 적어도 백일 이상으로 하고, 매일 기도를 시작할 때와 끝날 때는 반드시 발원을 해야 한다. 즉, “이 기도의 공덕으로 선조들의 죄업이 소멸하고 득락을 발원합니다”라고 소리 내어 기도하는 것이다.

 

조상이 천도되면 기도 속에 반드시 징계가 있지만 비몽사몽간이나 꿈속에서 조상이 천도되는 모습을 보게 된다. 그런 징계가 없으면 조상의 죄업이 너무 무겁거나 성의가 부족하다고 생각하고 다시 기도하거나 덕분에 지도법사를 찾아서 만나 가르침을 요구하는 것이 좋다. 징계가 있어도 예정된 기간은 충족하고 나서 해재기도를 한다. 입재기도 때처럼 제물을 바치고 조상의 천도를 감사합니다. 천도가 된 후에도 수행에 대한 열정이 식지 않으면 본격적인 수행에 들어가게 한다. 보통은 천도가 된 후에 모든 것이 순리대로 잘 풀리고 현실생활에 충실해지고 수행하는 마음이 없어진다. 2, 사업장 해소를 위한 참가 조상이 천도가 되어도 수행에 대한 열정이 식지 않거나 오히려 더 강해지면 그 사람은 이번 평생에 수행할 예정인 사람이라고 봐야 한다. 환생에 실패한 수행을 계속하는 것에 출원하여 다시 태어난 사람인지, 수행한 조상이 자손을 인도하는 경우이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세속적인 생활이 항상 무의미하고 외롭게 느껴진다. 그런 사람이라면 천도기도를 하는 동안 스스로 확신할 수 있는 영감과 계시를 받는 것이 보통이다. 이처럼 수행을 계속하기로 결심한 사람은 먼저 참회를 통해 자신이 묵은 업장을 소멸시키는 것이 좋다. 업장이 모두 소멸되면 그 자체가 이미 수행의 끝이므로 완전한 업장 소멸까지 욕심할 필요는 없고, 수행을 방해할 정도로 큰 업장을 소멸시키는 것을 목표로 한다. 간회기도는 특별한 방법을 찾지 못하고 매일 시미즈를 모시고 신앙대상에게 요전에 저지른 죄악을 소멸시켜 달라고 마음으로 기도한 뒤 예정된 성전을 읽거나 신앙대상의 명호를 부르거나 절을 한다. 그리고 마음속에 떠오르는 과거의 실수를 바치는 공부를 하면 된다. 시봉부를 하면서 자신의 잘못이 떠오르면, “내가 저지른 어떠한 실수를 간회합니다”라고 소리 내어 말하면서 절을 하는 것이 좋다. 시분 공부는 수행자가 일상생활 속에서 중단해서는 안 되기 때문에 그때 자르고 참회하는 것은 쉽지 않지만 하루에 한 번 이상은 시미즈를 모시는 곳에서 신앙대상으로 절약하고 또 잘못을 저지른 상대를 마음속에 떠올리며 끊임없이 용서를 구한다.

 

이렇게 해보면 마음 속에 응고하던 죄의식이 하나씩 없어지고, 자신은 전혀 기억할 수 없는 전생에게 저지른 실수까지 생생하게 떠오르며 해방된다. 그리고 마음속에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평안과 안정이 찾아온다. 죄 의식의 해독은 여기서 다시 열거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죄의식은 다른 것보다 마음에 깊게 새겨진 상처이기 때문에 죄의식이 많은 사람은 수행을 제대로 할 수 없다. 따라서 간회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하다. 사업장 참회에서 반드시 알고 넘어야 할 사항 중 하나가 물자령 천도다. 물자령이란 낙태한 아이의 영가인데 낙태아는 세상에 태어나 볼 수 없는 영혼이기 때문에 다른 영혼보다 원한이 더 깊다고 한다. 게다가 그 가해자가 타인이 아닌 부모이기 때문에 원통성이 늘어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물자령이 있는 사람은 반드시 물자령 천도를 한 후에 수행해야 한다. 존속살해, 다음에 큰 죄가 낙태라는 생각으로 참회하지 않으면, 수장은 천도가 되지 않는다. 다음으로 생각해야 할 사항은 불선참회다. 죄로 여겨지는 허물은 물론이고 능동적으로 좋은 일을 하지 않았던 부분도 참회 대상이라는 의미다. 죄를 범했다고는 생각되지 않지만, 신경이 쓰이지 않는 경우가 여기에 해당한다. 그런 생각이 든 이유는 사람답게 행동할 수 없었다는 자책감 때문이지만, 수행의 끝이 당신과 내가 하나가 되는 경지인 것을 생각하면, 능동적인 선행이 사람다운 사람의 당연한 행위인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사실을 알면 참회에 반드시 따라야 하는 요소가 선행의 실천임을 알 수 있다. 옛날에 신세를 낸 것을 상환한다는 심정으로 모든 생명이 내 몸의 일부라는 생각으로 타인에게 베푸는 선행이야말로 간회의 가장 큰 요소다. 이러한 참여는 실행 중에 항상 연습해야하며 실행의 일부입니다. 그래도 수행 사전 준비인 것처럼 따로 따로 설명한 이유는 처음 수행을 시작할 때 경전 연구나 진리 탐구에 착수하기 전에 반드시 집중적인 참가 수행 기간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바쁘게 돌아간다는 말이 있다. 영예를 윤회하고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 생명의 본질임을 생각할 때, 짧은 생애에 완성을 목표로 수행하려고 하지만, 수행 초기에 참가회 기간을 따로 두는 것이 시간의 낭비로 생각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동족은 왜 유령으로 취급되고 행동했는가? 그것은 그들이 자아가 죽고 하나님으로 거듭난 갱생자였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초인은 죽은 일어난 사람들의 다른 이름이다. 죽은 각성해도 모른다는 말은 동이족이 모르는 것은 아무도 모른다는 의미가 담긴 말이다. 스스로의 틀을 깨고, 스스로의 완전성을 깨닫고, 하나님으로 깨어난 사람들이 동이족이다. 인도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 유적이 모헨조달로이다. 이 이름의 의미는 죽은 사람들의 언덕이라고 한다. 상고 시대에 전세계에 퍼져 있던 소터 중 하나가 인도 문명의 뿌리가 되었다. 구약성서 창세기는 동이족이 새로운 나라를 세우는 과정을 기록한 문서 중 하나이다. 고대 세계 어디서나 일어난 사건인 봉토입국 과정이 모세라는 현저한 유대인 종교 지도자에 의해 천지창조의 이야기로 신성화된 것이 창세기다. 공자가 동경했던 동이의 나라는 순임금으로 봉토를 분리해 주나라의 무왕이 운나라를 칠 때 눈치채지 못했던 상고시대 교황청이었던 동이족의 조선국이었다. 간단히 말하면 공자는 죽은 각성할 수 없고 동이족 풍류에 입류하지 못한 낙제생이었다고 볼 수 있다. 우리겨레는 조선의 정통맥을 계승한 나라로 인정받아 조선이라는 국호를 사용해 우주의 중심을 상징하는 태극도형을 국기로 사용하고 있다. 어쩌면 이것이 한겨레가 진행되는 길을 암시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꿈에서 깨어나, 잠에서 깨어나, 과부에서도 깨어라. 동이족과 풍류의 실체에 대해서는 박용숙 선생님이 한국의 시원한 사상을 비롯한 여러 책에서 자세히 밝혔다. 내용이 어려워서 그런지, 아니면 믿어주는 사람이 없기 때문인지 몰라도 지금은 절판되었다고 한다. 괴레의 아르를 찾는 사람들이 얼굴을 올릴 수 없는 부끄러운 일이다. 동이족의 후예인 한겨레의 한 사람임을 자랑하는 사람이라면 천손민족이라는 선민사상에 빠져 유대인이 저지른 실수를 반복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런 배고프를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문화 속에 녹아 있는 초인문화의 흔적을 찾아 죽은 각성하고 접화군생이었던 풍류인의 길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ㅡ, 얻는 것은 본래 없다. 초인의 길은 갱생에서 시작된다. 죽은 각성하는 동이족의 길, 그것은 나라는 생각이 죽어 진정한 나로 거듭나는 길이다. 수행자들은 갱생을 깨달음이라고 부르고, 득도, 도통, 초월 등의 이름으로 부르기도 하지만, 이 글에서는 연성이라고 명명했다. 일반인들은 물론, 수행자조차 착각하고 있는 사실 중 하나가 연성(깨달음, 갱생, 도통…)을 특별한 능력을 얻는다고 생각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연성은 내가 무엇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사라지는 것은 연성인데, 가지고 있지 않은 내가 무엇을 얻을 수 있는가? 연성은 모든 것을 버리고 모든 생각을 비운 후에 밝혀지는 그런 마음의 상태다. 얻는 생각도, 얻었다는 생각도 서지 않는다. 그 상태로 내가 우주다, 진실이다. 얻어야 할 것도 본래 없기 때문에 그렇게 얻을 수 있는 것이 있을 리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깨달음을 얻고 진리를 얻자 울면서 수행한 사람은 연성하는 순간에 허한 마음을 깨지 못하고 미소만 만들게 된다. 바로 모든 것이 용서한다. 진리조차도..... 그러므로 수행자는 모르는 진리에 대한 욕심에서 버려야 합니다. 금강경독송회에서 “수행을 한다고 생각하면 탐욕은 마음이고, 수행이 잘 안 된다고 생각하면 성내는 마음이고, 수행이 잘 된다고 생각하면 어리석은 마음이니 이 모든 것이 번뇌다. 연성 과정 동안 항상 이 사실을 마음에 새겨 잊지 않도록 하십시오. 얻는 것이 본래 없기 때문에 서둘러 이유가 없다는 사실, 얻는 것이 없기 때문에 버리지도 않고, 또 잡아야 할 것도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 심지어 마음이 비어 나타나는 어떤 초상 현상이나 초능력도 자랑스럽게 하는 것이 없다는 사실을 잊지 않도록 하십시오. 깨달은 이들에 의해 피곤하게 강조되어 온 이 사실을 다시 칭찬하는 이유는, 당신이 스스로를 떠난 그 순간부터 걸어가는 초인의 길로, 다른 사람은 잊어도 잊어서는 안 되는 점이 이것이기 때문이다.

 

단전 뷰가 수행의 기초 속의 기초로서 활용되는 이유는 여러가지 있습니다만, 한마디로 정리하면 단전이 인체의 중심이기 때문입니다. 즉, 단전 뷰는 인체의 중심을 장악하려는 중심 포획에 해당한다. 연습에서 캡처가 중요한 이유는 중심이 진리의 다른 이름으로 사용될 수 있는 요인이기 때문입니다. 무게 중심이 잡힌 물체는 흔들리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사람도 중심이 잡히면 심신이 안정되고, 심신이 안정되면 천지자연과 동화(일체화)할 수 있다. 왜 단전이 인체의 중심인가? 검색창에서 단전을 검색해 보세요. 탄다와는 도가로부터 이르는, 심신의 정기가 모이는 곳. 던은 약을 의미하고 던전은 인체에서 가장 귀중한 약을 만들어내는 장소로서의 논이라는 의미다. 따라서 단전은 생명력·활동력의 원천이며, 생식력·성장력의 기본이 되는 곳이기도 하다. 단전의 위치에 대해서는 다양한 설이 있어 한마디로 정의하는 것은 어렵지만, 일반적으로 상단전·중단전·하단전으로 분류한다. 상단전은 뇌 부분, 중단전은 심장에서 명칭 부분, 하단전은 배꼽 아래 부분이다. 보통 단전이라고 할 때는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하복 부근을 가리키며 밧카이라고도 한다. 특히 하단전은 모든 경락이 모이는 장소로서 건강을 보존하는 장소이며, 기류의 요체이다. 또한 생명력을 배양하는 장소이며 복식 호흡의 기본력이기도합니다. 한편, 상단전은 신의 집이며, 중단전은 동의 집(위부)이며, 하단전은 정의(정구)이다. 정에서 기기가 일어나고, 기기는 중단전에 머무른다. 키로 신이 생겨 하나님은 상단전에 머물러 있다. 진수(眞水)와 진기(眞氣)가 합쳐져 ​​정을 낳고 정은 하단 앞에 머무른다. 심호흡에 의해 마음이 상·중·하 3단전을 차례로 돌리는 것으로 무병·장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단전 호흡 또는 복식 호흡이라고합니다. 이러한 양생술은 이미 중국의 전국시대(BC ) 초기부터 이뤄져 후한대에 보편화되었다. 단전에 대해서는 이 정도만 알 수 있다. 그리고 인체의 중심으로서의 단전은 배꼽 하부에 있다는 하단전에서 정확하게 말하면 제대단다이다.

 

통일성, 완전성, 초월성 등의 이상적 관념에까지 쓰이는 성이라는 말은 파고들 정도로 이상한 개념이다. 그렇지 않니? 아마 그것으로 깨달음을 견인이라고 부를지도 모른다. 공자가 말하는 것을 음식과 색은 성으로 했다. 먹는 것과 섹스의 본질을 제대로 파악하면 딱딱해진다는 말로 바꿔도 상관없는 말이다. 억지도 그런 억지가 없다고 말하고 싶지만, 이 말과 일맥상통하는 가르침은 불교의 수행지침서인 우엄경에도 나온다. 아난아! 도대체, 중생이 달콤한 것을 먹기 때문에, 살아 독한 것을 먹기 때문에, 죽기 때문에, 이 모든 생물이 저주를 구하고자 하는 것처럼, 세계의 다섯 가지 냄새 야채를 끓여야 합니다. 그 다섯 가지 매운 야채는 끓여서 먹으면 음란한 마음을 발생하고, 날아서 먹으면 성내는 마음이 더해지므로, 이 세계에서 매운 야채를 먹는 사람이 비록 십이부 성전을 설법한다고 해도, 시방의 하늘이나 신선들이 그 냄새를 맡고 모두가 덕에 없을 것이며, 또 매운 야채를 먹는 사람은 삼키기를 닦아도 보살과 하늘과 신선과 시방의 선신들이 와 수호하지 않기 때문에, 강력한 마그니의 왕이 그 틈을 극복하고, 어리석음을 찬미하기 때문에, 죽어 마왕의 권속이 되었지만, 마그니 아난아! 보리를 닦는 사람은 5 개의 매운 야채를 영원히 자릅니다. 수행의 첫 턴이 온 신채를 먹지 않는다고 말할 정도다. 정력을 숭배하는 최근 사람들이 가슴에 새겨야 할 말이 아닌가? 달리 정력제를 찾을 필요 없이 다섯 개의 매운 음식만 근면하게 먹으면 정력이 넘치는 가르침이기 때문이다. 주역은 더 친절한 섹스 교과서입니다. 「이치네 이치요 지위도(一陰一陽之謂道)」라고 했다. 한 번 햇볕에 일단 그늘이 되는 것이 진리라는 뜻이다. 길이라는 문자의 무게에 너무 심하지 않고, 조심해 생각해 보세요. 물론 성적이 아니라 성적이다.

 

사람들의 지능이 발달해 출산에는 남성도 필요하다는 사실을 남성도 알게 되어 사회의 규모가 커지고 방위를 위한 무력의 비중이 커지고 여성의 절대적인 권위는 무너지고 남성 중심의 부계 왕권이 성립한다. 필요에 따라 성립한 부계왕권이지만, 남성 우월적인 사회제도는 부자연스러울 수밖에 없고, 그러한 제도를 유지해야 했던 애처로운 남자들은 그 사회를 변호해 주는 이념을 필요로 하고 그렇게 태어난 것이 오늘 고등종교라고 불리는 가르침이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구약성경이다. 여성이 뱀으로 상징된 남근에 의해 정복된 후, 성가신 뱀이 사탄에서 팔렸다. 그 훌륭한 정력제가 말이다. 풍류의 가르침을 부정하고 등장한 기독교(정확하게는 유대교)이지만, 우상 숭배는 아이로니컬에도 유대인 나라의 이스라엘 국기에 그대로 남아 있다. 다윗의 별이라고 불리는 육각형 별은 머리와 뱀을 결합한 음양화합의 상징입니다. 비록 후대에 양성과 목소리의 종합으로 실현되는 완전성의 상징이라는 고상하고 추상적인 설명이 덧붙여졌지만, 그 실체는 우상들이 가던 섹스가 그 뿌리이다. 바이블을 읽고 자란 서양인이 아가페와 에로스를 혼동하고 러브가 곧 섹스라고 착각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동양과는 다른 것은 없다. 고자와 선녀는 수행할 자격조차 주지 않는 불교로 정력을 증강시킨다는 이유로 오신채를 금지하는 것도 정상적인 생각이 아니다. 이 모든 것이 성에 대한 오해와 올바른 정력관리법이 전해지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연성에서 성은 큰 비중을 차지합니다. 연성은 연성을 찾아가는 길입니다만, 그 의미에서 연성으로 바꾸어도 의미가 크게 변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 테마를 깊이 파고들 것이다. 먹고 붙는 것은 모든 종교에서 교리의 중요한 기초를 이루고 있습니다. 생명의 탄생과 유지가 이 두 가지 본능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는 이상 종교가 이들을 장악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두 가지 본능을 문화의 발판으로 정착시킨 최초의 종교가 동이족의 풍류다. 동이족은 농경을 시작하고 음식을 확보하기 위해 생존의 가장 큰 위협으로부터 자유로워졌다. 그리고 오늘 한국에 남아 있는 세계 최고 수준의 식문화를 발전시켰다. 그 상세를 알고 싶은 사람은 박용숙 선생님의 한국의 미학사상이라는 책을 보고 싶다.

 

자연생태계에서 먹는 것과 같은 위력을 발휘하는 생식본능도 동이족에 의해 인류문화의 구심점으로 정착했다. 그 첫 번째 형태는 종교로서의 우상 숭배이다. 다산과 풍요의 상징인 화가 난 여신상과 그 여신에게 임신을 시켜 태어난 아이들을 지킬 수 있는 튼튼한 남신상을 함께 모시는 종교가 우상 숭배다. 그 대표적인 문화유산이 새마을 운동 전까지만이라도 전국 어느 마을에서도 볼 수 있던 장승(백스)이다. 그 두 번째 형태가 남신(天神)과 여신(지신)이 붙어 태어난 아이에게 좋은 땅을 골라 나라를 세우고 다스릴 수 있도록 한 봉토입국의 정치제도인 봉건제도다. 동이족의 남자들은 흙으로 단을 쌓고 신을 모셔진 사당에서 여신을 수호하고 공부했고, 여성들은 지붕을 덮은 집을 세우고, 신을 모신 종실에서 남신을 섬기고, 신의 씨앗을 받고 천자를 낳았다. 우리 역사에 자주 등장하는 천제의 아들은 이렇게 태어난 동인들이다. 이 제도에서 유래한 종묘사직이 왕실을 가리키는 별명이 되어 종묘사직으로 접화군생하던 동이족의 가르침이 종교의 본래 의미이다. 고대 세계는 이 종교에 의해 다스리는 과정에서 발전하여 지역에 따라 다양한 인류 문화가 형성되었다. 지금 신라의 진흥왕이 화랑제도를 부활시킨 과정을 이해할까? 예쁜 여자를 골라 원화하고 갤러리의 구심점으로 한 것은 사당을 계승한 것이다. 그렇다면 종실은? 그것은 이미 있었다. 신라를 비롯한 왕실은 그 자체가 종실이다. 천제의 혈통을 이어받은 왕이 바로 남신이자 전국에서 선택한 후궁들이 신녀들이었던 셈이다. 따라서 신라왕실에서 부활시킨 갤러리는 새로운 제도가 아니었다. 그 이전에는 대등한 관계였던 종실과 사당이 종실 우위의 체계로 개편되었을 뿐이다. 따라서 최지원이 란람비 서문에서 풍류라는 종교의 이름을 밝힌 것은 합리적이고 당연한 이유가 있었다. 공자가 예찬한 동이족의 정통을 신라가 있었다는 자부심이 난란비서문을 쓴 숨은 의미였던 것이다. 오늘의 고등종교는 동이족의 세계 지배에 불만을 품고 있던 무사계급 출신의 귀족들이 자신들의 반역을 정당화하기 위해 풍류를 짜고 만들어낸 모양에 불과하다.

 

그러면 고등종교들의 가르침에서는 금욕을 필수 교리로 채택하고 금식과 단식을 중요한 수련법으로 가르치고 음행에 과민반응을 보인다. 기독교에서는 간음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죄가 된다고 가르칠 정도다. 대신 고등종교는 정신적인 해탈과 구원을 내건다. 풍류에서는 음양의 조화와 화합을 통해 근본적인 합일상태로 회귀하려는 현실 지향적인 사상을 갖고 고등종교는 육체에서 나오는 모든 욕망을 죄악시하므로 현실 부정적인 가치를 추구한다. 고등종교가 지배하는 세계가 멸망하지 않으면 오히려 신기한 일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러한 태도를 크게 문제시킬 필요는 없다. 절실한 마음으로 진리를 찾는다면 언젠가는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고등종교도 그 뿌리는 풍류의 가르침으로 시작되는 자류이며, 목표에 대한 근본적인 인식은 크게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생물학자가 관찰한 바에 따르면 동물과 사람이 가장 성욕이 왕성해질 때는 생명의 위협을 느낄 때라고 한다. 곤충이나 어류 등의 하등 동물로부터 잘 관찰되는 교배를 마치면서 목숨이 다하는 모습은 종족 보전의 본능이 생존 본능과 대등한 힘임을 나타낸다. 이러한 성욕의 힘, 최근에는 정력의 잠재력을 발견하고 활용하는 것은 수행자들의 긴 숙제였다. 특별한 수행법이 없는 유교와 기독교에서는 사회의 질서유지에 중점을 두고 방음을 금지하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개인의 완성에 중점을 둔 불교나 도교의 경우에는 성욕에 대해 더 높은 규제를 하고 있다. 불교에서는 성욕이 마음의 안정을 깨고 수행을 방해하는 점을 중시하고 치욕을 독점하도록 가르치고 있다. 아난아! 이들 중생들이 삼키게 들어가기 위해서는 먼저 청정한 계율을 엄격히 지키고 음욕의 마음을 영원히 끊고 술과 고기를 먹지 말고 불로 음식을 깨끗이 하고 날기의 기운을 먹지 말아야 한다. 아난아! 내가 하는 사람이 음란한 마음과 살생하는 마음을 끊임없이 삼계에서 빠져나오는 그런 법이 없기 때문에 마치 음욕이 독사보다 심하게 생각하거나 적과 도적을 보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성욕이야말로 플로이드가 말한 죽음의 충동이다. 도교에서 성교를 하면 사람이 짧아진다는 말은 결코 무언이 아니다. 모든 생물은 평안한 환경에서 그 상태를 즐긴다. 부모의 보호를 받고 있는 아이들이 세상의 경치나 놀이에 제대로 떨어지고, 잡다한 생각이 없는 것 같다. 즉 스스로의 생활을 맛보면서 성장하는 것이 본능이며, 여기에 필요한 본능이 식욕이다. 그러나 그 행복한 상황은 그리 길지 않습니다. 부모의 보호하에서도 죽음의 위기는 누구나 경험하고, 나이가 들면서 쌓이는 죽음의 공포에 대한 기억은 맹목적인 생활의 충동으로 개체 보전 욕구와 동시에 종족 보존 욕구를 강화해 성욕이 증대하게 된다. 환경이 나빠질수록 성욕이 강해지는 것은 종족 보존 욕구가 개체 보전 욕구의 변형이기 때문이다. 가혹한 환경에서는 더 많은 자녀를 두지 않으면 종족을 유지할 가능성이 커집니다. 그 아이를 자신의 일부로 보기 위해 종족 보존 욕구가 개체 보존 욕구의 변형이라는 것이다. 자신의 씨를 남기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우는 동물들의 행동은 종족 보존 욕구가 일종의 죽음을 향한 충동임을 보여준다. 남성이 자주 잠자리에서 여성을 보고 죽여준다고 하는데 그런 이유가 있는 셈이다. 오늘 성적인 풍기 문제가 세계적인 문제로 대두하는 이유 중 하나로 인류의 집단 무의식이 느끼는 위기의식을 다룰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성욕이 위기 상황에서만 발동하는 것은 아니다. 인류가 유전시켜 온 유전자는 종족을 보존하기 위해서는 평소에도 비상시를 갖추고 후세를 두도록 진화해 왔다. 그것도 인생의 충동에 지지 않는 크기의 욕망이다. 따라서 식욕을 억제하지 않고 수행을 계속하면 성욕이 점점 활발해집니다. 그러므로 수행자들은 정력이 세어 이성의 유혹에 더 약하며 한번 맛을 보면 헤어지기 어렵다. 이런 사실을 경험으로 알게 된 선배들이 자신들도 해결할 수 없었던 문제이기 때문에 궁도책에서 가르친 것이 식욕을 억제하는 것이었다. 식욕과 성욕을 경쟁시켜 타락만은 저지하려고 한 셈이다. 과거에는 음식을 찾는 것이 어려워도 금식과 단식이 권장되었겠지만, 오늘처럼 음식이 남아 있는 세계에서 단식이나 단식은 더 이상 추천하는 미덕도 아니다. 그러므로 성욕을 관리하는 것이 현대의 수행자가 선택하는 가장 바람직한 방법이며, 그것이 정력 관리법이다.

 

성욕이 발동되면 한 번 기뻐하십시오. 마침내 당신 안에 잠재하고 있던 죽음의 충동을 소멸시킬 기회가 온 것이다. 그것도 영원히 나를 속여 온 거짓 내가 죽어가는 상황에서 말이다. 이것이야말로 불생 불멸의 문 앞에 서 있었기 때문에 기뻐하지 않으면 옳다. 이성을 보거나 상상하지 않았을 때 성기가 발기하는 것을 도교에서는 활자시라고 부른다. 죽음과 같은 암흑 속에서 일간생명의 빛이 나타난다는 뜻이다. 이것은 물론 오랜 세월에 걸쳐 도달하는 경지라고 한다. 도교 수행 지침서에서는 이때 정신을 집중하고 호흡을 멈추고 그 기운을 회음혈을 거쳐 독맥으로 유도하도록 가르친다. 맞는 말이지만, 그것은 성욕이 개입되지 않아도 발기가 될 정도로 길게 수행된 사람이나 가능한 방법이며, 일반적으로 성욕이 발동한 경우에는 사용하기 어렵다. 남자라면 사정하기 쉽고, 여자라면 몸이 펄펄 끓여 주체하기 어려워진다. 그러므로 이런 경우에는 즉시 호흡을 관찰하십시오. 단전을 들여다볼 필요도 없고, 코에 정신을 집중하면서 자신의 호흡 상태를 점검하면 된다. 호흡이 관찰되면 마음 속에서 신앙대상을 불러 욕망을 바치고 그 후 단전을 내려다보게 한다. 이것이 정력 관리법의 전부이다. 거짓말처럼 성욕이 사라질 것이다. 순식간에 지나가는 이 과정에서 일어나는 사건의 의미는, 당신이 깨달음에 도착한 후에도 제대로 알 수 있을 정도로 미묘하고 비밀이다. 그만큼 당신의 의식 깊은 곳에서 일어나는 일이므로 눈치채기 어렵지만, 수행에 미치는 효과는 형용하기 어렵다는 의미다. 세상이 많이 좋아지고 이런 내용까지 밝혀 공개된다. 어쨌든 사람도 할 수 없는 것은 이런 글은 읽지 않는다. 더 재미있는 일이 세상에 퍼지고 있어 굳이 수행하지 않아도 정력이 넘치는 각종 정력제가 넘치는 세계에서 수행하는 것에 신경쓰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사람다운 사람, 초인이 되어 자신과 타인을 구하기 위해 노력하는 인류의 랜턴이나 이런 글을 보면서 공부하는 마지막 고비가 되었다는 이야기다. 정력관리법으로 관리된 정력, 즉 그 짧은 순간에 감처럼 사라진 성욕은 어디로 가는 것일까?

 

중국 당시대를 전후해 불교와 도교가 결합해 불경을 도교식으로 해설한 글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하는 이 글은 불교의 우엄경이 선도 수행의 원리를 비롯한 이야기와 암시로 숨기고 있다고 설파한다. 바다 속의 순금이란 기아혈로 얽힌 진지한 씨앗인 김탄을 가리키며 털끝 같은 생각도 없다는 것은 생각이 끊겼다는 말이며, 성이 명궁에 들어간다는 말은 초월의식이 단전에 나타난 금기라는 것이다. 몸)을 이루는 재료인 진기가 왕성해진다는 뜻이다. 스스로를 되돌아보고, 시봉 공부를 열심히 하면, 생각이 있는 순간, 생각이 끊어져, 천지 자연과 혼련 일체가 되는 무념 무상의 상태에 들어간다. 그 상태에서 세속으로 복귀하지 않고 단지 그 상태에 젖어 있으면 어느 순간 천지의 기운이 단전으로 모인다. 이 기운을 자신의 생각을 볼 때처럼 보면, 즉 단전을 수동적으로 관찰하고 있으면, 그 기운이 움직여 머리에 올라 눈썹 사이에서 밝은 빛으로 나타나고, 심지어 동요하지 않고 보고 있으면 그 빛이 단전으로 돌아가 금단을 이룬다. 이 금단이 스스로 움직여 경맥을 돌리는 것을 관찰하면 길을 이룬다는 것이다. 九奉頌에 이르면 “용은 시를 읊고 호랑이는 휘파람이 제일 좋을 때 하차를 서둘러 메어 법륜을 굴린다. <원주 13> 이 절은. 늙고 병의 범인이 계명을 지키고 음욕을 끊고 동기를 사고 구호하고 보익(보익)하는 것이다. 「정은 마음을 용화시켜, 숨을 조절해 참석해, 입정하는 것으로, 「때」는 아이. (보완)한다. 법륜에 「미묘」라고 불리는 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진의가 전일해서 잊지 않고, 도울 일 없이 행. 주 . 기. 정지에 있어서는 모두 절조에 맞는 것이고, 법륜은 법대로 윤전함이므로, 하차가 운반해 승강시키는 것을 비례한 것이다.

 

신신마다 묘법륜 30도로 등급을 이루고, 300도로 10신을 완료하면, 광명이 3번 나타나게 되는 불기를 굳게 쌓았다. 다만 이 하나의 법은 만약 정남(정남). 정녀(정녀)로서. 보리심을 크게 발한 사람이 아니면 닦아 증득하는 것이 어려운 것이다. 법륜을 구르는 것은 속하면 바람이 크고 불꽃이 격렬하게 구르지 않고, 늦게 하면 바람이 적고 불꽃이 냉냉해서 구르지 않기 때문에, 「이윽고 안으로도 안된다」라고 하는 것으로, 승강하는 적에게 범용적으로 잊어 버리면, 진위가 흩어지기 때문에, 絫行를 체찰 그렇게 하지 않으면 모두 길을 이룰 수 없다. 길을 다치게 하는 도적은 음욕보다 심한 것이 없기 때문에 두려워 삼가할 수 있을까? 이것이 진정한 초인의 길이다. 염엄경으로 음욕을 경계하고, 설산의 강력한 하얀 소의 똥을 가져오고, 법정을 세우려고 한 설마가 정력을 관리하고 진지하게 변화시켜 도태를 이루겠다는 의미임을 많은 고승들이 비밀로 가르쳐 온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법륜이 바로 선도의 도인양생술에서 말하는 주천의 경로인 임독양맥이며, 법륜을 돌린다는 말은 운기행공을 한다는 목소리다. "조용히 빨리 움직이면 움직임에 따라 그 시기에 적절성을 잃지 않는다"는 말은 사고가 끊어져 생긴 맑은 정신인 혜를 사용해 단전에서 생긴 진기를 관찰하는 수행인 정을 이끌어야 한다는 뜻이다. 조용하고 조용히 관찰하면서 그 자연 그대로 따를 뿐이라는 말은 이 과정에서 생각을 통해 먼저 이끌어서는 안되며, 잡련을 하도록 금단의 움직임을 두지 말아야 하기 때문에 단지 관찰해야 한다는 의미다. 생각을 완전히 없애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며, 생각이 완전히 없어진 사람이라면 시키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정신적인 깨달음과 육체적인 단련을 병행하는 성명쌍수 혹은 정혜쌍수의 수행이 올바른 길인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러나 깨달음은 수행의 중간 단계에 불과하기 때문에, 수행을 계속하지 않는 각성자들은 퇴보할 수밖에 없고, 서서히 세속의 권력과 영합하면서 종교권력을 형성해 나갔다. 그들에 의해 무자비한 이단 탄압이 이루어진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기독교의 마녀 사냥과 유교의 사문유적의 출척은 그 대표적인 경우다. 그러므로 알리는 것은 알려진 것이 맞다고 생각된다. 타락한 초인이 일으키는 부작용의 대표적인 사례가 히틀러의 경우라는 사실을 고려하면 그다지 모험도 없을 것이다. 그런 이유가 있어 나타난 초인들이 증기로 퇴보하기는 곤란하기 때문이다. 그럼 성의 마지막 수수께끼를 드러내자. 이 설명을 이해하면 내가 동경해도 당신이 정력을 낭비하지 않도록 할 것이라고 확신하는 내용이다. 당신은 이성에서 사랑을 느낀 적이 있습니까? 그리고 사랑하는 이것과 함께 할 때, 욕정도 욕정이지만 견딜 수 없는 허공을 느끼고 명명된 음식점을 전전한 적이 있는가? 사람이 살생보를 만나면 일반적으로 세 가지 감정을 느낀다고 한다. 살생 보란이란 전생에게 자신을 죽인 적을 다시 만나 적을 돌려보려는 대상을 가리킨다. 그 처음은 식욕이다. 갑자기 배고프고 무언가를 먹고 싶어진다는 의미다. 그런 마음이 먹는 대상을 찾게 하고, 야생 상태라면 그 때 눈에 띄는 대상은 생명을 바쳐 살생보를 돌려보내게 된다. 회가의 수족관에 들어간 생선을 보면서 시골 가정에서 모이는 토종닭을 보면서 산에서 잔디를 튀는 노르와 토끼를 보면서 TV 화면에 나오는 씰을 보면서 입맛을 치면 그 대상 동물이 당신의 살생 보인 셈이다. 둘째는 성욕이다. 자주 섹스를 잡아 먹는다고 표현하듯 성욕도 살생보를 만날 때 발동하는 변형된 식욕이라고 한다. 사랑을 위해 죽고, 사랑을 위해 망설이지 않고 살인을 하는 사람들이 많은 이유가 여기에서 밝혀진다. 표면의식은 사랑을 속삭이지만 잠재의식을 넘어선 초의식은 적을 돌려주는 것이 보통 사람들이 나누는 사랑인 셈이다.

 

셋째는 살의이다. 다만 죽여 버리고 싶은 충동이 솟아나는 것으로서 복수를 한다는 일념으로 현생을 선택하고 환생한 사람들이 만나는 살생견의 경우가 많다. 그 계기가 어떤 것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런 마음이 일어나는 대상이 살생 보인 것이다. 이제 석가 원숭이가 죽지 않고 음행하지 않고 먹는 것을 줄이는 이유를 알고 있습니까? 서로를 죽이고 죽어도 기꺼이 영예를 윤회하는 중생들의 딱딱한 모습을 보고 그 완고한 악연의 사슬을 부수도록 부탁한 것이다. 당신이 초인의 길을 걸으면 그런 인연이 조금씩 보이게 된다. 이 세 가지 욕망을 바치고 비울 수 있으면 좋지만, 그 또한 마음대로 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일소되는 와중에도 비우려는 의지를 두지 않는 것, 그것이 수행자의 고행이다. 정력을 제대로 관리하면서, 시봉 공부를 제대로 하고 있으면, 그리 길지 않아 최초의 깨달음이 온다. 그 깨달음이 자의식의 소멸로서 그런 본래의 마음이 나타나는 것이다. 불교 참전의 수행자들이 견성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크리슈나 무르티가 자신의 혁명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단계가 초인의 제1단계로서 여기만 도달해도 그 이전의 자신과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인생이 시작된다. 이 깨달음이 죽어 다시 태어나는 갱생입니다. 보통, 실행자는 여기가 실행의 끝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여기가 본격적인 실행의 출발점입니다. 본격적인 수행의 첫 단계는 자연과의 동화입니다. 자의식이 사라지고 ‘나라는 생각’이 갖고 있던 ‘내 한계’가 함께 사라진다. 내 의지가 그대로 자연스럽게 전해진다. 자연과 심령의 대화가 가능해져 일반인과는 전혀 다른 세계를 살게 된다. 자의식이 없어진 사람이 자연을 완전하다고 느끼지 않는다면, 그러한 초인 한 사람에 의해서도 천재지변이 일어날 수 있다. 그러므로 자의식이 없어진 사람을 공개적으로 만져 자의식이 돌아오게 해서는 안 된다. 여유가 어려운 사태가 발생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 과정은 꽤 오래 걸린다고 한다. 통상, 구년면벽(구년면벽)이라고도 불리고, 10년 공부라고도 불립니다. 내가 갈 수 없었던 길이라고 정확하게 설명할 수는 없지만, 이렇게 오래 걸리는 이유는 사업장 해소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정신의 초월상태를 지원할 수 있는 육체가 준비되면 정신은 의식 내부에 잠겨 있던 의식인 업식을 탐험할 수 있게 된다. 끝없는 세월 동안 윤회하면서 쌓아온 아르곡이 구체적으로 나타난다. 이것을 업장이라고 하지만, 업장은 보통 환상이 되어 나타난다. 환상이라고 표현했다고 해서, 참깨 같은 영상 정도로 착각하면 곤란하다. 영가들이 사후에 체험한다는 업식의 환상보다 선명한 실체로 나타납니다. 이 단계에서 가장 먼저 나타나는 것이 중음층에 머물렀던 연가들이다. 여기서 점멸 환상에 속아도 그대로 연가가 육체의 일부를 차지하고 밀어붙이는 빙의 상태에 빠져 버린다. 단지 오면 오는 거리에 가면 가는 대로로 떠나, 그런 대상을 만나는 자신을 보고만. 그러면 과거세에 그 영가와 맺은 인연이 자연스럽게 나타난다. 거기에 노출되어 과거의 감정을 소생시키지 않고 보고 있으면, 그 영가와의 업장이 소멸한다. 이것이 초인의 업보 해탈이다. 업보나 업장이라는 것도 일종의 생각이며, 생각은 곧 기억된 경험이다. 그 기억이 사라져 본연의 나에게 돌아갈 수 있다. 이처럼 삼계의 모든 생명과의 관계를 소멸시키는 것이 제도 중생이다. 김강경에서 “아트다라삼막삼보리심을 얻은 선남 선생님은 마음을 항복하는 것을 9개의 모든 중생을 모두 열렬히 들려줄 것이지만, 모든 중생을 모두 제도해도 중생도 제도한 적이 없다고 생각한다”고 가르쳤다. 끝까지 가서 보지 않고 어떻게 알고 있는지 묻고 싶습니까? 자의식이 소멸된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다음 단계의 수행이 아니어도 수행을 내팽창시키지 않으면 명명과의 교류 정도는 자주 일어난다. 비록 고생의 길이지만 말이다. 고생을 조금이라도 줄이고 싶은 경우, 특히 영가들의 고통을 호소하면서도 구원받지 못하고, 함께 고통받는 천지옥에 빠지고 싶지 않다면, 기초공부를 확실히 하고 기회가 왔을 때 단번에 끝을 보도록 하라.

 

지금까지 제시한 내용은 개개인의 사람들이 자신의 힘으로 종말에 대비할 수 있는 최선이라고 생각된다. 나머지는 완성된 인간인 초인들이 모여 가는 것이며, 그들이 하는 것은 인류가 스스로 초대한 멸망 위기를 해소하는 것 같다. 일본의 예언연구가인 고토벤씨는 나치 독일의 히틀러가 마성의 예언자였다고 밝히고, 히틀러의 예언에 따르면 지금의 인류는 2039년에 사라진다고 한다. 그 일부는 초인으로 진화하고, 나머지 대부분은 자연환경의 격변을 거쳐 퇴화하고, 초인에 의해 관리되는 수동적 인간이 된다고 한다. 그 원인은 환경오염과 방사능, 우주에서 유입되는 미지의 에너지 등이라고 하며, 이러한 위협을 경험하면서 살아남기 위해 인간의 잠재능력인 뇌의 구조가 변화해 초인과 일반인으로 이분된다는 것이다. 불행히도, 나는이 예언을 부인하기위한 희망적인 정보를 얻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그 예언을 지지하는 정보는 주변에 넘쳐나고 있다. 언론에서 날마다 감도는 환경위기, 근대 선각자들로 불리는 김일부, 최수은, 강증산 등 많은 예언, 신약성경 요한의 묵시록과 잠자는 예언가 에드가 케이시의 예언 등… 그러한 예언을 모두 믿는 것은 아니지만, 참고는 살아가려고 노력한다. 그 중 인류가 진화한다는 관점에서 또 다른 과학이론이 신경이 쓰인다. 생물의 진화는 공생에 의해 행해진다는 학설이지만, 원시 단세포 생물이 다세포 생물로 진화한 것은 단세포 생물이 변화하는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공생한 결과라는 주장이다. 실제로 인간의 육체를 구성하는 세포의 대부분은 그 자체로 독립된 생명체인 효소라고 한다. 이번 환경 변화에도 새로운 단세포 생물이 출현하고, 그 생물이 인류의 몸에 들어가 공생하기 때문에 인류가 진화할 가능성도 있다고 생각된다. 어쩌면 숭수나 강증산 같은 분들이 예언한 괴질이나 병동의 정체가 이런 것이 아닐까? 우리의 괴레에게 전해 오는 다양한 발효식품은 아마 이러한 공생관계를 이용하여 인류의 진화를 촉진하려는 방편의 하나가 아니었을까?

 

제가 지난 67년간 야마노초와 약초에 관심을 갖고, 그 중에서도 백초효소에 관심을 집중시키는 것은 여기에서 하나의 가능성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산야초 효소는 자연 상태에서 왕성한 생명력을 발휘하는 산야초를 발효시켜 얻은 효소이다. 그 자체도 건강식품으로서 효과가 있으므로 내려야 본전이라고 생각해서 많이 만들어 먹도록 한다. 약이 되는 삼아초는 약용 식물에 모두 소개해 두고, 시간대로 삼아초 발효법도 소개하려고 한다. 다시 알고 계십니까? 열심히 수행해 영적으로 초인이 되는 동시에, 육체도 신종효소와 공생관계를 하고, 기존의 육체에서는 도달할 수 없었던 새로운 경지의 초인이 출현하는 것은 아니다. <연세기 종료> [출처] 연세기 그러니까 그런 세계 | 저자의 구름에 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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